우유병이 굴러가던 골목길

by 이 경화




예전에 서울 우유를 집으로 배달시켜 먹었다. 유리병 안에 든 그 흰 우유가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되었다. 엄마가 빨래를 하시는 동안 나는 엄마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살금살금 대문을 밀고 우유를 찾아오려 했다. 아마 엄마도 아시는데 모르는 척해 주시는 것 같았다. 대문을 빼곰이 열자 미니 우유가 놓여 있었다. 그 우유를 드는 순간, 우유병이 미끄러지면서 점점 내 눈에서 벗어나 골목 아래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야단맞을 생각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울음소리가 더 크게 나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울고 싶었는데 울음은 내 몸을 뚫고 나왔다. 엄마는 빨래를 바닥에 내려놓고 놀라서 나오셨다.


“경화야. 왜 우니?”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손은 눈을 가리고 한 손은 골목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제서야 우유가 굴러간 걸 눈치채시고 나를 안아 주셨다.


“우리 저 아래 가서 우유 데려오자.”


나는 눈물을 훔쳐냈다. 엄마 손을 다른 날보다 더 꼭 잡고 골목을 내려갔다. 엄마 손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금세 땀이 났다. 친구네 집을 지나는데 그 집 개 미미가 나를 보더니 반갑다고 뛰어올랐다. 나는 잠시 미미의 머리를 만졌다. 엄마는 나를 가만히 기다려 주셨다. 한참을 내려갔다. 엄마는 “우리 경화 우유가 어디까지 간 걸까?” 하고 나를 안심시키시며 한편으로는 우유가 깨졌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하셨다. 엄마 얼굴은 반반이었다. 골목 아래 끝까지 내려갔다. 그때까지도 우유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엄마도 포기해야 할까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연탄재가 쌓인 구석에 우유가 누워 있었다. 엄마는 우유를 얼른 집어 올리시고 행주치마로 우유병을 닦으셨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시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우리 경화 우유 괜찮네. 아유, 다행이다.”


나는 우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탄재 옆에 피어 난 제비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 손을 다시 잡으면서 우유를 따 달라고 했다.


“엄마. 우유 따줘.”


엄마는 내가 목이 마를 수도 있겠지 하시면서 우유 입구 비닐을 벗기고 속뚜껑을 열으시며 “그래, 저기서 내려오려면 목이 막힐 만도 하지. 자, 마셔” 하고 우유병을 건네셨다. 나는 제비꽃이 목말라 보여서 제비꽃한테 우유를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때 왜 눈시울이 붉어지셨는지 모르겠다. 우유를 나랑 같이 한 모금 드시고 내 손을 보태서 제비꽃에게 조금 따랐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이 올 때마다 그때 제비꽃을 떠올린다. 연탄재가 쌓인 구석, 누군가의 발에 채이기 쉬운 자리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들고 있던 작은 꽃. 깨질 수 있었지만 깨지지 않았고, 마셔야 할 우유 옆에서 굳이 피어 있었던 존재. 그날 나는 배가 고프지도, 정말로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그저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고 살아 있는 것에게 조금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선택은 우유를 마실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려움이 지나간 자리에서 무엇을 먼저 보느냐의 문제였다. 깨진 것, 잃을 뻔한 것, 아찔했던 순간 대신 끝내 남아 있던 것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삶의 많은 갈림길 앞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불안은 늘 먼저 오고 결정은 언제나 늦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골목을 다시 내려간다. 엄마 손을 잡고 땀이 나도록 꽉 쥔 채로.


그리고 연탄재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피어 있던 그 제비꽃을 떠올린다. 깨지지 않은 것보다 피어난 것을 먼저 보는 선택, 가져야 할 것보다 나눌 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방향. 아마 나는 그날 이후로 인생의 많은 순간을 조금 느리게, 조금 조심스럽게, 그러나 끝내 사람 쪽으로, 꽃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모든 선택은 이미 오래전에 한 병의 우유와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 조용히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