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을 이렇게 배웠다

by 이 경화


가팔랐던 금호동에서 아홉 해를 살았다. 가팔랐던 대신 풍광이 좋았다. 매일 달라지는 풍광을 바라보며 나는 시간과 계절을 배워 나갔다. 아침의 빛과 오후의 그림자와 저녁의 속도를 그곳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덕 위에 서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한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렇게 세상이 움직이는 방향을 조금씩 익혔다.


할아버지는 새로운 곳에 가시면 늘 가장 높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걸 좋아하셨다. 높은 곳에 서서 내 손을 잡고 계시며 “경화야 새로운 곳에 가거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아래를 보지 않은 채 내게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눈을 감아 보렴.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느껴야 해.” 잠시 말이 멈춘 뒤에는 “그다음에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봐야 한다”라고 덧붙이셨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시작의 손끝에서 멈추던 손끝까지 시선을 따라 움직였고 바람이 지나온 자리와 흘러가려는 방향을 눈으로 확인했다.


할아버지는 세상에는 반드시 시작과 맺힌 곳이 있다고 하셨다. 길도 물도 사람의 삶도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닿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도 바람은 다르다고 하셨다. “바람은 시작도 맺힌 곳도 없이 그냥 흘러만 가는 거야.” 그래서 바람이 집에서 멈추면 안 된다고 하셨고 “머물러 눅눅해지면 그건 더 이상 바람이 아니야”라고 하셨다. 바람과 햇볕은 늘 집을 지나가고 통과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설명해 주셨다. “경화야 길이 생기려면 엄청 오랜 시간과 많은 생명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야 해. 그래야 거기가 길이 되는 거야.” 아무것도 없던 자리가 수없이 밟히고 비와 바람을 맞고 다시 또 밟혀서 비로소 길이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길을 보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이 위를 지나갔는지 알게 되는 거야”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길이 편해서 생긴 줄 알았다. 사람이 다니기 좋으니까 자연스럽게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은 늘 편해서가 아니라 견뎌서 남는 것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사람 마음에도 길이 있어.” 그 길이 넓은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드나들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참아준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바람도 햇볕도 모든 생명도 그 마음에 잠시 깃들었다가 다시 제 길로 가는 거란다”라고 하셨고 마지막으로 “경화야 너도 어른이 되면 이런 사람이 되렴” 하고 조용히 덧붙이셨다. 그 말은 명령처럼 들리지 않았다. 부탁도 아니었다. 다만 오래 살아본 사람이 건네는 삶의 방향 같았다.


그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는 나를 안아 꼭 안아 주셨고 아무 말 없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따뜻했고 조금 부끄러웠고 이유 없이 안심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야 알겠다. 그것은 할아버지만의 조용한 축복 의식이었다는 것을 말 대신 삶을 건네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새로운 곳에 가면 할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가장 높은 곳에 먼저 오른다.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보고 물이 어디로 모이는지 살핀다. 그리고 마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길은 어떤 사연을 안고 나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에 발을 디딘다. 서두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부로 살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아직도 할아버지에게 배운 방식으로 세상에 들어간다.


그래서 어떤 마을에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석 달은 그 마을의 골목 곳곳을 다녀본다. 아침의 골목과 해 질 무렵의 골목과 비 오는 날의 골목을 모두 걸으며 누가 서두르고 누가 오래 머무는지 어디에서 말이 많아지고 어디에서 침묵이 깊어지는지를 본다. 그렇게 시간을 두고 걸어야만 그 마을이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내가 감당해야 할 결을 가진 곳인지 알게 된다. 나는 여전히 길을 먼저 믿고 길이 허락한 만큼만 그 안으로 들어간다.


길 끝에 서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 이 길 위를 지나쳤던 동물들도 새들도 곤충들도 한때는 분명히 이 자리를 밟고 갔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길은 그 무게를 기억하고 그래서 나는 그 위를 지날 때마다 발걸음을 조금 더 낮춘다. 길은 늘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난 길도 생각한다. 굽은 길 돌아가는 길 그 길들은 모두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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