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별 보기 좋은 계절도 없다. 만물은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전 어릴 적부터다. 별들을 보면 그 오묘한 다른 층위를 발견하게 된다. 먼 곳에서 빛나는 별과 가까이에서 빛나는 별은 그 층위가 다르게 느껴진다. 우주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 날은 깊이가 다른 해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저를 뚝 떼어 밤하늘에 올려다 놓은 듯한 그 경이로움. 그곳에서는 위와 아래가 뒤섞이고 거리의 감각이 무너진다. 별들은 점이 아니라 층이 되고 나는 그 층 사이에 잠시 서 있게 된다.
그러다 운이 좋은 날에는 별들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별들이 운다니 믿지 못하겠지만 별들도 우리처럼 운다. 나는 곶자왈에 살면서 더 많은 울음을 듣는다. 울음이라고 해서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별들의 진동과 회전 그리고 발광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나와 공명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울음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 울음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몸 안에서 먼저 도착하는 떨림이다. 숨이 잠시 멈추고 생각이 한 박자 늦어질 때 그 울음은 이미 나를 지나가고 있다.
카페 입구에는 오래된 황칠나무 두 그루가 있다. 낮에는 그저 묵묵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그들은 하늘과 먼저 대화를 나눈다. 별들이 울음을 울던 날 황칠나무도 격렬하게 떨린다. 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바람의 것이 아니라 밤의 것이고 그 떨림은 나무의 몸을 빌려 지나가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숲 가까이에 살면 정말 기이한 밤하늘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숲과 하늘은 마음을 열고 보는 사람에게만 그 진실을 허락한다. 마음이 닫혀 있을 때 하늘은 늘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까만 밤에 진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별들과 무수히 많은 천연의 색으로 발광하는 존재들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빛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그 속도는 일정하지 않다.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아닌 그저 각자의 시간으로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인간적인 약속인지 알게 된다. 하늘에는 시계가 없다. 다만 지속과 소멸만이 있다.
때로는 하얀 비익조의 형상도 보인다. 날개를 펴고도 날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형상은 언제나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나는 이럴 때마다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할아버지는 달력의 뒷장에 생명나무를 그려주시며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은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가르침이라기보다 고백에 가까웠다. 인간은 빛의 찌꺼기들이 모여 이루어진 물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그 이후로 자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빛이란 어둠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빛은 언제나 어둠을 등에 지고 나타난다.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더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빛은 개념이 아니라 상태였다. 존재가 잠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별들이 빛날 때 그들은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준비를 하며 빛난다. 그 사실이 나를 오래 붙들었다.
별들의 울음소리와 숲의 레퀴엠을 듣고 싶다면 나를 찾아와도 된다. 요정처럼 숲의 오래된 정령처럼 나는 그 별들의 음악을 그대에게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무엇을 알려주겠다는 마음은 없다. 함께 서 있고 함께 올려다보는 일만이 가능하다. 하늘을 오래도록 올려다보는 그 황홀한 시각에는 추위도 배고픔도 아무것도 없다. 몸은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의식은 이미 다른 층위로 이동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왜 그렇게 밤하늘을 오래 보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유는 늘 나중에 생기기 때문이다. 밤하늘 앞에서는 목적이 먼저 사라진다. 사라짐 이후에야 비로소 머무름이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할아버지의 영혼이 먼저 하늘로 올라가 아주 먼 하늘에서 별이 되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떠남과 도착이 동시에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진다.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빛나고 있을 무렵 할아버지 방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와 이모가 놀라 “아부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할아버지와 이별한 뒤였다. 그 소리는 울음도 비명도 아니었다. 세계가 잠시 균형을 잃는 소리였다.
별들은 울고 있다. 울고 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별들은 다만 그렇게 있다. 그렇게 있음이 나에게는 울음으로 닿는다. 나는 그 울음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이유를 묻는 순간 이미 거기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별 앞에서 나는 묻지 않는 법을 배운다. 묻지 않을 때에만 별들은 조금 더 가까워진다.
밤은 설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밤은 오직 머무름만을 요구한다. 오래 올려다본다는 것은 이해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사라지지 않겠다는 것은 붙잡겠다는 뜻이 아니다. 함께 어둠 속에 남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곶자왈의 하늘은 깊다. 깊다는 말도 충분하지 않다. 깊이는 수직이 아니라 겹쳐짐에 가깝다. 빛과 어둠이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를 견디며 겹쳐 있는 상태. 황칠나무는 흔들리고 나는 그 옆에서 가만히 선다. 나무와 나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흔들림은 나무의 것이 아니라 이 밤 전체의 성질이다. 나 역시 그 성질의 일부가 된다.
별들이 가까워지는 순간이 있다.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거리를 잃는 순간. 그때 나는 나를 잊고 하늘은 이름을 잃는다. 이름이 사라질 때 비로소 존재는 가벼워진다. 비익조의 형상은 보였다가 사라진다. 본 것인지 기억인지 그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사라질 수 있는 것만이 이 밤에 허락된다.
할아버지는 빛을 말했다. 말씀은 남았고 몸은 사라졌다. 그러나 사라짐은 부재가 아니다. 다른 방식의 있음일 뿐이다. 별이 된다는 것은 높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멀어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너무 가까워지면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없으므로. 멀어짐 속에서만 윤곽은 또렷해진다.
그날 밤 쿵 하고 울린 소리는 이별의 신호가 아니었다. 세계가 한 박자 늦게 숨을 쉬는 소리였다. 존재가 자리를 옮길 때 항상 그런 소리가 난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도 대부분 잊는다. 기억하는 사람만이 별을 오래 본다.
나는 오늘도 별을 본다. 보지만 붙잡지 않는다. 붙잡지 않기에 별들은 다시 울 수 있다. 울음은 남기지 않기에 더 오래 지속된다. 그렇게 밤은 매번 새로워지고 나는 매번 처음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은 여전히 울고 있다. 내가 듣고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