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을 끓이는 일은 언제나 시간을 요구했다. 불 앞에 오래 서 있는 일. 끓어오르려는 것을 지켜보다가 불을 낮추는 일. 넘치지 않게 가장자리를 살피는 일. 나는 그 시간을 노동이라기보다 기다림에 가깝다고 느꼈다. 무언가를 더 얹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제 몸의 형태를 드러낼 때까지 가만히 두는 일. 요즘의 나는 그 기다림을 글 앞에서 배우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잘 먹지 않을 것이 뻔했다. 허기는 늘 뒤로 밀렸고 집중은 배고픔 위에 세워졌다. 그래서 나는 8리터 대용량 솥을 꺼내 곰국을 한 솥 끓였다. 처음에는 양지를 넣고 언니들과 떡만두국을 먹었고 그 다음에는 순대와 내장을 넣어 순대국을 끓였고 그 다음에는 떡을 넣어 퉁퉁 불은 떡국을 며칠이나 먹었다. 빨리 후다닥 먹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기에 곰탕만한 음식은 없었다. 이리 먹고 저리 먹고 그런데도 양이 도무지 줄지 않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추렴을 시작했다.
추렴은 사람을 부르는 일이 아니었다. 뼈에 붙은 고기를 정리하는 일. 남김없이 발라내어 다음을 준비하는 몸의 행위였다. 칼을 세우기보다는 손으로 만져가며 어디까지가 살이고 어디부터가 뼈인지 천천히 가늠하는 일. 억지로 떼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 나는 그 동작이 묘하게 글쓰기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탈고를 앞둔 시기였다. 문장은 이미 충분히 써졌고 더 보태면 과해질 지점에 와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쓰는 일이 아니라 덜어내는 일이었다. 설명을 줄이고 감정을 눌러두고 붙어 있던 말들을 하나씩 발라내는 일. 추렴은 그래서 정리였고 정리는 버림이 아니라 질서를 다시 세우는 행위였다.
우리는 흔히 시작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삶의 많은 순간은 끝맺음과 정리에 의해 다음으로 넘어간다.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건너온 일들은 다음 계절에서 다시 발목을 잡는다. 붙어 있던 고기를 발라내지 않은 뼈처럼 불필요한 감정과 말들은 국물의 맛을 흐리게 한다. 나는 곰탕을 보며 알게 되었다. 본질은 늘 단순하고 잡미는 대부분 과잉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계절이 바뀌면 항상 삶을 추렴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입춘이 찾아왔다. 달력 위의 날짜라기보다 몸 안에서 먼저 오는 기척이었다. 정리가 끝난 자리로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 텅 빈 상태가 아니라 속이 정돈된 상태에서 맞이하는 변화. 입춘은 시작이 아니라 통과에 가까웠다. 이미 지나온 겨울을 정리한 자에게만 조용히 문을 열어주는 계절.
탈고와 입춘과 추렴은 각각 다른 이름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지나온 것을 정리하고 남길 것을 남기고 다음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 나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유기적 흐름이라는 것을 이제야 느끼기 시작했다.
글도 그렇다. 한 번에 다 써내려가려 하면 감정이 탁해진다. 하루쯤 식혀 두면 위에 뜬 말과 가라앉은 말이 구분된다. 그때 국자처럼 문장을 떠내야 한다. 먹을 수 있는 것만 남기고 지금의 몸이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글쓰기는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선별의 태도에 가깝다.
나는 뼈를 남겼다. 기억의 중심 경험의 골격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단단한 부분들. 그리고 살은 발라 국물과 함께 나누었다. 지금의 내가 건넬 수 있는 만큼만. 이 탈고는 완결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렴이었다.
냉동실에 소분해 넣은 곰국 봉투들을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런 날들이 오겠지. 다시 쓰느라 허기질 날 사람을 만나느라 마음이 비워질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할 날. 그때마다 국물 하나를 꺼내 데우듯 나는 오늘의 나를 미래의 나에게 남겨 두었다.
그러니까 이 곰탕은 저장식이 아니라 예비의 마음이다. 견디는 동안 쓰였던 날들이 다시 살아갈 힘으로 돌아오도록 마련해 둔 장치. 추렴은 끝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다음을 가능하게 하는 준비다.
나는 오늘도 국자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며 생각한다. 기름을 걷어내는 일이 꼭 문장을 걷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겨두면 더 깊어질 것 같고 더 풍부해질 것 같지만 실은 가장 먼저 흐려지는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름은 본질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본질 위에 가장 늦게 덧입혀진 층이다. 삶도 글도 대개 그렇게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뼈가 있고 그 위에 살이 붙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름이 생긴다. 그 기름은 경험의 흔적이자 애착의 잔여물이다. 그래서 걷어내는 일은 늘 망설임을 동반한다. 나의 시간 나의 노고 나의 사연을 함께 덜어내는 것 같아서.
그러나 국물은 기름이 빠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낸다. 투명해진다는 것은 가벼워진다는 뜻이 아니라 불필요한 층위를 통과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문장도 그렇다. 남기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걷어낸 문장들 뒤에야 비로소 생각의 골격이 보인다. 말이 줄어들수록 사유는 선명해지고 감정이 빠질수록 태도는 또렷해진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남기려 했는지도 모른다. 설명과 변명과 증명을 한 문장 안에 다 담아두려 했다.
기름을 걷어내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에 가까웠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다음으로 넘길 것인가에 대한 판단.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붙들고 있던 감정들 오래 데운 기억들 이제는 역할을 다한 관계들. 그것들을 전부 끌고 다음 계절로 갈 수는 없다. 추렴은 냉정한 작업이 아니라 책임 있는 정리다. 뼈를 버리지 않기 위해 살을 정리하는 일이고 본질을 살리기 위해 부수적인 것을 떠나보내는 일이다.
나는 이제 안다. 덜어낸다고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걷어낸 기름은 국물 밖으로 나와 또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문장에서 빠진 말들 역시 사라지지 않고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쉰다. 그러니 걷어내는 일은 포기가 아니라 이동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곳으로 보내는 일. 아직은 필요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잠시 치워 두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정도에서 멈춘다. 더 넣지 않고 더 설명하지 않고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잘 발라냈고 잘 걷어냈고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덜어내지 않았다고. 이 문장들은 나의 전부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통과한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이면 된다. 다음 계절에는 또 다른 솥을 걸 것이고 또 다른 기름을 걷어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