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에 서다

by 이 경화



입춘. 말 그대로 봄이 선다는 날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의 입춘맞이를 보자. 계절이 맞물리어 바뀌는 절기, 언제부터 우리는 절기를 터부시하게 되었을까.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시간과 계절의 흐름 속에 맞춰져 있다. 해가 뜨고 지는 일과 비가 오고 그치는 일, 몸이 지치고 다시 회복되는 리듬까지도 모두 계절의 손짓 안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계를 더 믿고 달력을 더 믿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을 점점 잊어왔다.




동양철학에서 입춘은 계절의 시작이라기보다 기운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다. 겨울은 저장의 시간이고 음이 가장 깊어지는 시기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많은 준비가 이루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입춘은 그 음이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양을 향해 몸을 트는 첫 지점이다. 아직 추위는 남아 있지만 기운은 이미 돌아섰고 그래서 입춘은 완성된 봄이 아니라 방향을 바꾼 봄이다. 동양철학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변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결과보다 그 이전에 일어난 미세한 움직임을 삶의 근본으로 보았다.




서양에도 계절을 맞이하는 날은 있다. 다만 그 방식은 다르다. 서양의 계절은 기운의 흐름보다 빛과 어둠, 생과 죽음의 대비로 이해되었고 절기보다는 축제와 의례의 형태로 남았다. 춘분이나 부활절처럼 겨울을 통과한 이후에 맞이하는 사건들이 그것이다. 서양의 계절이 결과를 기념하는 시간이라면 우리의 절기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변화를 먼저 알아차리는 시간이다. 눈이 녹기 전, 꽃이 피기 전, 기운이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붙잡아 이름으로 불렀다. 입춘은 봄이 온 날이 아니라 봄이 서기 시작한 날이다. 이 차이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의 절기는 과정을 존중하고 사람의 마음을 계절 안에 조용히 놓아두는 지혜를 품고 있다.




나는 입춘을 맞기 위해 집안의 환기와 대청소를 했다. 창문을 열자 겨울 동안 쌓여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밖으로 빠져나갔고 차가운 바람이 방 안을 훑고 지나가며 묵은 냄새와 함께 머뭇거리던 마음까지 밀어냈다. 대청소는 겨울 동안 쌓아두었던 침묵과 미루어둔 감정들을 하나씩 밖으로 꺼내는 작업에 가까웠다. 손에 잡히는 먼지보다 쉽게 쌓이는 것은 마음의 때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버리지 못해 쌓아두었던 물건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 미뤄두었던 종이들, 말하지 못한 채 눌러두었던 생각들. 입춘을 맞는다는 것은 봄을 들이는 일이 아니라 겨울을 보내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할아버지가 입춘이 되기 전에 하시던 것을 고대로 배운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저 창문을 열고 집 안팎을 살피며 묵은 것들을 하나씩 밖으로 내놓으셨다. 할아버지는 신발장의 신발을 모두 꺼내시고 수돗가에서 신발을 닦아 두셨다. 고무신은 물에 담가 솔로 문지르고 운동화는 끈을 풀어 먼지를 털어냈으며 구두는 마른 천으로 닦은 뒤 약을 발라 광을 내셨다. 신발을 대하는 손길은 사람을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밖을 향해 있는 것부터 정리해야 한다는 걸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신발장을 정리하고 현관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입춘을 맞이하는 우리 집만의 예식이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었지만 해마다 반복되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방식이었다. 현관은 집의 얼굴이고 밖과 안이 처음 맞닿는 자리다. 그곳을 비우고 닦는 일은 다가올 계절을 맞이하기 전에 지나온 계절을 정중히 보내는 일이었다. 입춘의 청소는 부지런함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웃들을 초대하고 입춘맞이 나눔을 할 생각이다. 간단한 요기가 아니라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해 대접할 예정이다. 함께 밥을 먹는 일은 안부를 묻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입춘은 혼자 맞는 날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계절이 바뀌는 날에 사람을 부른다는 것은 봄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의 초대는 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겨울을 잘 견디고 버텨왔다는 격려와 안부의 차원이다. 무엇 하나 작게라도 배운 대로 실천하는 하루가 요새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다. 입춘은 달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한 상에 둘러앉는 자리에서 비로소 선다.










매거진의 이전글배신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