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모습

by 이 경화


살면서 가끔 여기가 이생이 아니라 사후 세계가 아닐까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 장면들은 모두 봉사의 현장에서 찾아왔다.


첫 번째는 1992년, 막 개원한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봉사자로 일하던 때였다. 내 소임은 미사 해설과 서고 정리였다. 병원은 개방형이었지만 일부 폐쇄병동은 봉사자가 닿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환우들은 정해진 시간에 조별로 나와 산책을 했다. 나는 그들을 인솔하며 햇볕 아래 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웃던 그들의 얼굴이 어느 순간 이 세상의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환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니라 잠시 인간의 형상을 빌린 깨끗한 영혼처럼 보였다. 삼차원의 시간과 다른 층위에 서 있는 듯한 낯선 감각. 그 찰나가 내 봉사의 겨자씨가 되었다.


두 번째는 수도원이 운영하던 삼각지 행려자 밥집에서였다. 나는 밥솥의 누룽지를 긁어 드리고 솥을 닦은 뒤 다시 밥을 지었다. 어느 날 막 밥을 안치고 돌아섰을 때, 홀에 앉은 이들이 서로의 식판에서 반찬을 덜어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웃으며 음식을 나누던 그들의 손놀림이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표정과 이런 온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유학생활을 마친 뒤, 나를 도와주었던 이들에게 인사를 전하러 1년 만에 다시 찾은 호주에서였다. 공항에 마중 나온 자매와 함께 우연히 한 임종자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직장암 말기의 노인이었다. 그는 내게 죽음을 이렇게 말했다.


“마리, 죽음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해와 같단다. 신이 주신 선물이지. 그래서 나는 두렵지 않아. 너도 그날이 오면 이 평화를 알게 되길 바란다.”


그는 다음 날,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이후 몇 번이고 그 자리를 떠올렸다. 죽음이 공포가 아니라 평온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배웠던 시간이었다.


네 번째는 제주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을 따라 요양원에 봉성체를 갔을 때였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햇살과 바람, 사람들의 눈빛이 모두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수녀님이 모셔온 세 분의 할머니는 오래 돌봄을 받아온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분들은 내 손을 꼭 잡고 머리에 입을 맞추며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건넸다. 그 작은 사탕 하나가 이상하게도 눈물처럼 달았다.


그날 마음속에 문장 하나가 또렷이 남았다.


"오늘 만나는 이가 당신의 예수입니다."


이 네 번의 경험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천국은 사후의 어딘가에만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머무는 순간마다 스며드는 상태라는 것을. 나눔이 오가는 자리, 두려움이 평화로 바뀌는 자리, 서로의 손을 잡는 자리에서 우리는 이미 다른 차원의 문턱을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국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멀리 찾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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