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3일전 단상

견디는 동안 쓰였다

by 이 경화

삶을 뒤돌아보면 무엇 하나 허투루 일어난 일이 없었다. 그때는 실패라 여겼던 장면도 불행이라 단정했던 사건도 관계의 단절도 무너진 자리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궤적이었다. 삶은 직선이 아니었다. 직선이었다면 나는 이미 중간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삶은 나선이었다. 제자리에서 맴도는 듯 보이지만 조금씩 고도를 달리하며 같은 자리를 다시 통과하는 운동이었다. 나는 반복된다고 생각했던 시간 속에서 사실은 이동하고 있었다. 추락이라고 느꼈던 순간조차 다른 층위로의 진입이었다. 상실이라 믿었던 시간조차 깊이를 바꾸는 과정이었다. 나선은 완성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심화이고 극복이 아니라 변형이다. 삶은 나를 앞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더 멀리 가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이 내려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존재는 본래 미완성이다. 인간은 완결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를 구성하며 살아간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예측하지 못한다. 그 불안정함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움직임이다.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이다. 나는 오랫동안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안정이 오고 확신이 오고 흔들림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선의 구조 안에서 완성은 없다. 다만 깊어질 뿐이다. 인간은 위로 올라가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아래로 파고들며 넓어지는 존재다. 그래서 고통은 실패가 아니라 확장의 방식이다. 반복은 퇴보가 아니라 심화의 구조다.




나의 출간은 그 나선 위에 놓인 하나의 고리다. 이십 년 동안 써온 글이 드디어 한 권으로 묶였다. 그러나 나는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살다 보니 버티다 보니 견디다 보니 문장이 쌓였다. 누군가는 이것을 성취라 부르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생존의 흔적이다. 나는 올라가기 위해 쓰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썼다. 나는 인정받기 위해 기록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 글은 나의 야망이 아니라 나의 버팀목이었다. 하루를 통과하기 위해 문장을 붙들었다. 감정을 견디기 위해 언어를 세웠다.




출간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종이를 묶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세상 앞에 놓는 일이다. 이름을 걸고 시간을 제출하는 일이다. 나는 오랫동안 나선의 안쪽에서 나 자신과 싸워왔다. 이제 그 운동을 밖으로 드러낸다. 세상은 평가할 것이다. 누군가는 읽을 것이다.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것이다. 누군가는 축하할 것이다. 누군가는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반응 이전에 나는 이미 하나의 결단을 했다. 숨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나를 가리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출간은 결과가 아니라 노출이다. 문장은 기술이 아니라 고백이다. 한 권의 책은 나의 이력서가 아니라 나의 시간이다.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출간은 자기 증명의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확인이다. 나는 여기까지 움직여왔다. 나는 이만큼의 시간을 통과했다. 나는 무너지지 않고 나선을 돌았다.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다. 존재는 타인의 박수로 완성되지 않는다. 존재는 스스로의 지속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높이지 않는다. 다만 나를 드러낸다. 드러남은 완성이 아니라 용기다. 감춤은 안전하지만 드러냄은 위험하다. 나는 그 위험을 감수한다. 왜냐하면 나선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출간을 사흘 앞둔 지금 나는 묘하게도 고요하다. 들뜸보다 차분함이 먼저 온다. 기대보다 안도가 앞선다. 나는 이미 긴 시간을 통과해왔다. 이 한 권은 그 통과의 표식이다.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회전이다. 완성이 아니라 계속되는 운동이다. 삶은 앞으로도 나선을 그릴 것이다. 또 다른 질문으로 또 다른 시험으로 또 다른 낯선 자리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나는 다시 흔들릴 것이다. 다시 두려울 것이다. 다시 벅찰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추락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다른 층위로 이동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삶을 위에서 보면 하나의 나선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버티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절벽이다. 나는 그 절벽을 통과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 절벽 위에 한 권을 올려놓는다. 그것은 욕망의 결실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정지가 아니라 회전이다. 나는 다시 다음 고리를 향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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