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견디는 동안 쓰였다.

by 이 경화


얼마나 많은 생명이 지나갔길래 길이 되었을까. 나는 길의 초입에 설 때마다 풍경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떠올린다. 흙 아래 눌린 체온과 발바닥의 무게와 방향을 잃고도 다시 걸어야 했던 순간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망설임이었고, 누군가의 도망이었고, 누군가의 귀환이었다. 살기 위해 디딘 발걸음이 또 다른 발걸음을 불러내고, 그 반복이 땅을 눌러 하나의 선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선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걷지만 그 아래에는 생과 소멸이 겹겹이 눌려 있다. 길은 목적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의 축적이다.


풀이 자라고 동물들이 곤충들이 먹이를 찾아 이동하던 궤적, 아이가 엄마를 찾아 달려가던 발걸음, 누군가를 잃고 돌아서던 사람의 느린 걸음. 그런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고 서로를 덮으며 굳어졌을 때 비로소 길은 태어난다. 길의 탄생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늘 출산을 떠올린다. 보이지 않는 세포의 분열과 고통의 수축과 긴 숨의 파동이 끝내 하나의 생을 밀어내는 순간. 생은 그렇게 통과를 전제로 태어난다. 길도 그렇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놓여 있지만 그 아래에는 지나옴의 통증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나는 이 문장을 적으며 기쁨보다 먼저 적막을 느낀다. 세상은 출간을 성취라 부르지만 나에게 그것은 노출이다. 오래 눌러 적었던 시간들을 바깥 공기 속에 펼쳐놓는 일. 내 발자국의 모양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다기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는 잘 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썼다. 아무도 모르게 흔들리던 밤, 다음 날을 넘기기 위해 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를 하며 숨을 고르던 시간, 울음을 삼키기 위해 물을 틀어놓고 서 있던 부엌의 적막. 그 모든 날들이 문장으로 옮겨지며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이 책은 야심이 아니라 생존의 궤적이다.


그러나 길 위에 서자마자 나는 다른 질문을 받는다. 몇 부가 팔렸는지, 몇 위인지, 얼마나 빠르게 오르는지. 세상은 존재를 숫자로 환산하는 데 능숙하다. 나는 잠시 흔들린다. 내가 걸어온 시간들이 표로 정리되는 것 같아 두려워진다. 이 길을 아무도 걷지 않으면 어쩌지. 이 발자국이 의미 없다고 말해지면 어쩌지. 두려움은 늘 가장 낮은 층위에서 올라온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엉켜 가슴을 죈다. 나는 다시 계산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돌아간다. 생존은 언제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보면 다른 층위가 있다. 존재는 다수의 동의로 완성되지 않는다. 길은 많은 사람이 걸어야만 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가 그 위에서 숨을 고르고 방향을 다시 잡는다면 그 길은 이미 제 몫을 다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내 책도 그렇다. 수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지 못해도 누군가 한 사람의 밤을 통과하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존재는 속도가 아니라 밀도로 증명된다.


나는 길을 생각하며 나선을 떠올린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반복처럼 보이는 상승이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마주하지만 매번 다른 높이에서 답을 찾는다. 나는 여러 번 불안했고 여러 번 다시 걸었다. 지금의 불안도 낯설지 않다. 다만 더 선명할 뿐이다. 나는 도망치지 않고 이 불안을 통과해보려 한다. 두려움 역시 내가 걸어온 궤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길은 평탄하지 않지만 끊어지지도 않는다.


책을 낸다는 것은 길을 완성했다는 뜻이 아니다. 또 다른 길의 초입에 섰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시작점에 서 있다.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내가 보인다. 아이였던 나, 굶주림을 견디던 나, 이해받지 못해 분노하던 나, 체념과 결심 사이를 오가던 나. 그 모든 내가 서로를 밟고 지나 여기까지 왔다. 나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그 발자국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지나갔길래 길이 되었을까. 나는 이제 안다. 길은 위대한 선언으로 생기지 않는다. 작고 반복된 걸음이 서로를 밀어올리며 만들어진다. 이 책도 그렇다. 조용히 적어 내려간 날들이 모여 하나의 길이 되었다. 나는 그 길 위에 다시 선다. 숫자는 여전히 나를 흔들지만 나는 숫자보다 오래된 사람이다. 나는 이미 걸어왔고 이미 지나왔고 이미 여러 번 시작했다.


길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열려 있다. 나는 그 열림 앞에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걷는 사람으로 남기로 한다. 걷는 한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책은 그렇게 하나의 길로 놓였다. 누군가 건너올지 모르지만 나는 안다. 이 길은 허공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체온과 눈물이 눌려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길 위에서.


그리고 조용히 대답한다.


나는 아직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