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동안 쓰였다

드디어 내 손에

by 이 경화

#견디는동안쓰였다
#미다스북스
#이경화신작



드디어 작가로서 내 이름이 찍힌 책을 두 손으로 받았다. 택배 상자를 열어 책을 꺼내는 순간, 종이와 잉크가 뒤섞인 그 시큰하고도 따뜻한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그 냄새를 오래 맡았다. 이 냄새는 단순한 인쇄의 냄새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시간의 냄새 같았기 때문이다. 견디며 써 내려간 날들의 체온이 아직도 책장 사이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첫 장을 열기 전, 나는 책을 모두 모아 앞장에 쓴 헌정의 문구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엄마와 아버지, 외할머니께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를 낳고 키우고 지켜본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문장도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찍 떠났고, 누군가는 끝내 다정한 말을 다 건네지 못했지만, 그들의 침묵과 부재조차 내 문장의 토양이 되었다. 이 책은 내 이름으로 묶였지만, 사실은 그분들의 시간 위에 놓인 작은 제단과도 같다.

신인 작가를 열렬히 응원해 주신 네 분의 추천사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마음이 벅차올랐다. 연기 인생 50년의 무게를 온몸으로 증명해 오신 남경읍 선생님, 여고 시절 교실에서 내게 문장의 숨결을 알려 주셨던 시인 홍일표 선생님, 언제나 흔들릴 때마다 등을 밀어 주신 이현곤 변호사님, 맑은 언어로 사람의 마음을 건져 올리는 배정록 선생님. 이 네 분의 이름은 단순한 추천사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의 이정표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인연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 글을 좋아해 준 페친분들, 브런치에서 조용히 읽어 주신 독자들, 그리고 카페에서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 주었던 이웃들에게도 이 마음을 전한다. 내가 문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 문장을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중간에서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첫발을 디뎠다. 나는 크게 소리치기보다 조심히 걸어가고 싶다. 하루를 버티고 삶을 견디는 사람들을 위해, 내 문장은 이제 나에게서 떠났다. 더 이상 내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디엔가 가만히 내려앉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밤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처음 책을 낸 작가로서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묻는다. 문학은 반드시 위로여야 하는가. 작가는 독자를 가르쳐야 하는가. 정보를 건네야 하고 답을 제시해야 하는가. 나는 그 위계에서 한 발 비켜 서 있으려 한다. 누군가를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남겨 두고 싶다.



“견디는 동안 쓰였다”는 표현은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태어난 실제 조건이다. 잘 살아 보려 애썼지만 자주 멈추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겨우 하루를 넘겼던 날들. 설명할 힘조차 없던 시간 속에서 문장들은 나를 대신해 숨을 쉬었다. 나는 그저 그 숨을 받아 적었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덮는 당신이 지금 무엇을 설명하려다 멈추었는지, 무엇을 붙잡고 있다가 잠시 내려놓았는지 나는 묻지 않겠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잠시 앉아 있어도 괜찮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분명히 있다고. 당신이 견디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 안에서 무언가는 조용히 자라고 있다고.

작가라는 이름은 아직 어색하지만, 나는 이 이름을 가볍게 쓰지 않으려 한다. 초심은 다짐이 아니라 태도일 것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흔들리고, 더 깊이 사유하며 문장을 쌓아가겠다. 이 책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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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책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웃었다.
견디는 동안에도 삶은 멈추지 않았고, 그 삶이 결국 한 권의 책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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