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붓끝같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다듬어야한다

by 이 경화


정성스럽게 종이를 펼치고 묵을 갈고 정숙하게 붓끝을 다듬는 일. 나는 인연을 이 지점에서 설명하고 싶다. 인연은 그런 의미에서 절대 급하지도 갑작스럽지도 않게 다가온다. 붓을 들고 그 끝을 정성스럽게 다듬는 그 시점에 우리가 말하던 인연(因緣)은 비로소 연결지어진다. 백지에 붓끝이 닿고 묵향이 종이에 내려앉고 숨이 멈추어지는 딱 그 지점만큼 인연은 우리에게 스며든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거나 헤어짐을 반복하며 우리 내면에 어떤 궤적을 남기고 그 궤적으로 또 다른 인연을 불러들이는 것을 안다면 만남도 헤어짐도 우리에게 단 한순간도 무명(無明)으로 다가왔던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남도 처음부터 새로운 대상을 알아본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사실은 우리 안의 상처와 그림자 그리고 결핍이 불러들인 결과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정직한 모습을 계속 찾기 위해 깨끗하고 말끔한 거울을 허기진 모습으로 계속 찾아다니는 한 마리 가여운 존재에 불과하다.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붓끝으로 무심히 점 하나를 찍거나 획 하나를 그어도 그것은 결국 내 마음의 똑같은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연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불러들일 수 있다. 인연은 내 모습과 같다. 우리가 살며 길을 잃어버리거나 안개가 가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면 인연은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무심히 놓여진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깊은 곳에 다다른다.

살면서 곁에 아무도 남지 않는 것 같은 절대적인 고독에 쌓여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허기지고 갈증난 모습으로 손끝을 뻗어 누군가를 기다리며 인연을 더듬고 있다. 그 손끝에 닿는 무늬와 기억의 촉감으로 우리는 또 다른 인연을 만나고 그 인연의 때가 끝나면 다음 이정표를 찾아 떠나는 구도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구조되어 있다.




그러니 살면서 나와 같은 구도의 삶 위에 붓끝을 다듬는 인연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니 너무 외로울 것도 너무 결핍될 것도 너무 허상을 좇을 것도 없다. 늘 살면서 붓끝을 다듬는 것처럼 묵향이 번져나가는 것을 기대하면서 숨을 참는 것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그렇게 살 일이다.

그리고 살다가 같은 인연을 만난다면 뜨거운 가슴으로 서로 부둥켜 안고 울어도 좋다. 그 눈물이 굳어야 다시 인연이 만나진다. 만날 때마다 그저 따뜻한 가슴으로 안으면 된다. 많은 이들이 꼭 인연을 흘려보낸 후에 놓치고 난 후에야 그것이 인연이었음을 알아차린다. 다시 눈앞에 나타난 인연을 몰라보는 예도 흔하다. 우리는 변했다는 이유로 많은 상처를 달고 왔다는 이유로 그 인연을 외면한다.




그 인연은 많은 어려움과 돌밭을 헤치며 생긴 상처 때문에 억울한 취급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어두움은 보지 않고 다시 찾아온 인연의 상처만 돋보기를 대고 분석한다. 왜 이렇게 살았느냐 왜 내 앞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느냐는 질문은 바보 같다. 왜냐하면 인연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고 내 모습을 내 어두운 그림자까지 반영(反映)한 흠결없는 정직한 쌍둥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 강한 모습이나 밝은 모습을 비출 때는 반겨하고 내 어두운 모습이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면 피한다면 우리는 인연의 정확한 의미를 아직도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분명하다. 인연은 사실 빛이 있으면 밝음으로 어두움이 드리우면 상처가 드러난 것뿐이다. 그러므로 둘 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이 없다.

그런 인연이 그렇다면 언제쯤 올까라는 물음도 사실 어리석다. 그런 인연은 늘 찾아온다. 그런 인연은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붓끝을 다듬는 마음으로 인연도 정성스레 불러들여야 한다. 그것이 오늘과 내일 그리고 우리의 운명까지도 바꾸는 해답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인연을 기다릴 필요도 애써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붓끝을 다듬는 일. 매일의 마음을 닦고 고요한 마음으로 그 인연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한 장의 백지를 준비하는 일이다. 인연은 어느 날 묵향처럼 번져와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때 우리는 말보다 먼저 가슴으로 안아주면 된다. 질문 대신 미소를 분석 대신 기도를 기억 대신 온기를 건네면 된다. 그것이 인연을 맞이하는 가장 정성스러운 자세이고 그렇게 만난 인연이야말로 우리를 바꾸고 삶을 채우고 마침내 운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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