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심연의 무늬
마음은 물과 닮아 있다. 고요할 때조차도 끝없는 움직임을 품고 있고 한 방울의 말, 한 줄기 눈빛, 혹은 잊고 지낸 이름 하나에도 순식간에 파문이 일어난다. 물 위에 조용히 떨어지는 돌멩이 하나가 수면을 흔들 듯이, 사람의 마음도 어느 한순간 아주 작고 미세한 감각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요했던 내부를 흔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그 진동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어느 날 문득— 그것이 마음속 깊이까지 내려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어떨 땐 내가 그렇게 면밀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나 흠칫 놀랄 때가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던 하루 속에서 문득 마음이 스르륵 젖어드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이유를 모르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 감정의 뿌리를 따라가 본다. 그러면 언제나 거기, 무심코 던져진 누군가의 말 한마디나 눈빛 하나, 혹은 나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툭 떨어뜨린 감정의 돌멩이가 있다. 그것이 내 마음속 고요한 수면에 작고도 선명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 파문은 처음에는 작았다. 그런데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내 안의 오래된 기억들을 깨워낸다. 잊은 줄 알았던 말, 외면했던 얼굴, 지나쳤던 감정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고 나는 그 파문 속에서 비로소 나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흔들린다는 건 무너진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다. 감정이 계속해서 나를 흔든다는 건, 내가 아직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누군가의 마음에 나를 열고 있다는 뜻이다.
요새 나는 감정수업을 하고 있다.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매일매일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속에서 내 안에 일어나는 작은 떨림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것이 나의 수업이다. 감정이라는 건 참 묘하다. 정답이 없고 단정할 수도 없고 때로는 같은 장면에서도 다르게 반응하고 어제와 오늘의 내가 서로 낯설다. 그리고 감정이란 건 고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방 안의 공기처럼 조용히 퍼져 있다가, 어떤 기억 하나에 순식간에 농도가 짙어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리도록 쓰리고 또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는데 눈물이 고인다. 감정이 흘러넘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기보다, 그저 그 감정의 파문을 함께 지켜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물 위를 들여다본다. 지금 내 마음에 어떤 파문이 일어난 걸까 하고. 처음엔 이유를 알 수 없던 감정들이 시간을 들여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둘 실마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왜 아팠는지 왜 웃었는지 왜 도망치고 싶었는지를 알게 된다.
사람 사이에서도 마음의 파문은 일어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울림은 더 크고, 미세한 떨림 하나에도 오래 흔들린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히 그렇다. 애초에 나를 흔들 수 있는 사람만이 내 안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받는 일, 혹은 그 사람의 한숨에 내 하루가 무너지는 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마음의 수면을 고요히 내어주게 된다. 그 위에 누군가의 존재가 스며드는 순간부터, 이미 파문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설핏 웃어 버린다. 그냥 웃어 버린다. 눈물이 날 것도 같고 누군가를 미워할 것도 같고 모든 게 서글퍼도 문득 그 감정들마저도 사랑스러워진다. 그 순간 나는 안다. 내가 지나온 파문 하나하나가 내 마음의 결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웃음 속에서 나는 아주 조용히 아주 깊게 나의 진실의 원형과 만난다.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나의 맨 마음.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 외롭다고 말하지 못했던 마음, 그럼에도 누군가를 끝까지 품고 싶었던 마음. 나는 그 마음의 가장자리를 쓰다듬듯 바라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조용히 마주 앉는다. 그리고 비로소 안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감정의 본향이다.
감정은 때로 나를 너무 인간적으로 만든다. 논리나 체면 같은 것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면서도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복원시킨다. 어떤 감정은 내가 누구였는지를 기억나게 하고 어떤 감정은 내가 앞으로 누구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파문이란 늘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나를 제자리로 되돌려주는 흐름이다.
그러나 감정의 파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 안에서 시작된 물결은 결국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로 번지고, 다시 그 사람의 감정이 되어 되돌아오기도 한다.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서운함이 이어지고 얽히며 관계의 물결을 만든다. 나는 이제 안다. 감정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파동이 되어 누군가의 하루를 흔들 수 있는 힘이 있고, 그 또한 나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웃다가 다시 눈물이 나는 때도 있다. 그것은 미처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드는 일종의 작별처럼 찾아온다. 나는 그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눈물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냈는지를 확인한다. 그렇게 오늘도 마음의 물결은 고요히 흔들리고 나는 그 안에서 나를 계속 배워간다. 어떤 날은 가만히 파문을 지켜보고 있고 어떤 날은 내 안에서 그 파문이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문득, 눈물로 정화를 마친 그 지점에서 나는 인생의 새벽녘을 마주한다. 어둠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 남겨진 단 하나의 빛. 그것은 아직 작고 연하지만 분명히 새로운 날이 오고 있음을 말해준다. 마음도 그렇게, 파문 끝에서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