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생긴 울타리

by 마르치아


"사랑은 처음엔 아무런 계산 없이 주게 되지만, 상처는 언제나 어김없이 셈을 시작한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줄 때, 자신의 가장 따뜻한 부분을 함께 내어준다. 그 마음은 때로 말이 되지 못하고 행동이 되며,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하지만 세상은 그 따뜻함을 늘 같은 온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그것을 부담으로 느끼고, 어떤 이는 당연한 것처럼 취하고 떠난다. 그러다 보면 마음을 준 사람은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그것이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참 오래도 참는다.


상처는 크게 오는 법이 없다. 아주 작은 무심함, 아주 사소한 외면, 혹은 짧은 침묵. 그 작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날 마음 한켠에 경계가 생긴다. 처음에는 단지 물러섬이었다. ‘다음엔 덜 주어야겠다’는 결심 정도. 하지만 그 결심은 곧 마음의 담이 되고, 담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 담은 아픔의 흔적이고, 동시에 내가 나를 지키려는 마지막 수단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주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손을 내민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손은 가벼이 내밀어지지 않는다. 한 번쯤 젖은 나무처럼 조심스럽고, 불신 속에서도 믿음을 찾는 일은 더디고 힘겹다. 믿는다는 행위는 단지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결단이 되기 시작한다. 그 결단엔 반드시 고통의 기억이 함께 묻어난다.


사람은 상처받을 때마다 속을 접는다. 그것은 단순한 냉소가 아니다. 다만 예전처럼 자신을 무방비하게 내어줄 수 없다는, 체득된 슬픔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안다. 어떤 관계는 주는 사람을 너무 쉽게 소모시킨다는 것을. 애초에 받기만을 바라는 이들은 줄 수 있는 이의 빛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빛이 얼마나 오랜 시간 스스로의 어둠을 끌어안고 채워낸 것인지를.


그래서 우리는 계산 없이 주다가 상처받은 자리마다 작게나마 말뚝을 박는다. ‘여기까지’라는 이름의 말뚝. 이전에는 물처럼 흘러넘치던 마음이 이제는 조심스럽게 고여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 나를 내어준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나의 시간을, 온기를, 존재의 일부를 떼어내 건네는 일이라는 걸 점점 더 절절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절절한 체험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에게로 향하려 한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관계적 존재인지를, 또 동시에 얼마나 상처를 딛고 살아가는지를 증명해준다. 진정한 따뜻함은 무심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뜨겁게 데인 기억을 품은 이들이 더 조심스럽게, 더 간절하게 따뜻해지려 애쓴다. 그 따뜻함은 흉터 위에 핀 꽃처럼 아름답고 단단하다.


처음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계산 없이, 조건 없이, 그저 좋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한다. 두세 번의 호의, 작고 따뜻한 배려는 그 자체로 기쁨이 된다. 하지만 관계의 패턴은 생각보다 빨리 드러난다. 내가 주는 자로 머무르고, 상대가 받는 자로 굳어질 때, 그 관계의 디폴트는 어느새 정해져버린다.


그 시점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면, 마음은 계속 기울고 지치고 결국 상처받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정당한 거절’이다. 주지 않는 것이 미움이 아니며, 선을 긋는 것이 차가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삶을 통해 배운다. 이 모든 깨달음은, 결국 자신을 지키며 사랑하는 방법을 익히는 일이다.


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50년 동안 내가 배운 인간관계의 철학이다. 거절할 줄 아는 것, 내 마음의 온도를 지키는 것, 그리고 그 온도가 쉽게 식지 않도록 잘 간수하는 일. 그것이 결국은 나도, 너도 다치지 않게 하는 가장 따뜻한 배려다.


그리고 그 끝에는 문득 알게 된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결국 나를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나의 어리석음, 나의 후회, 나의 기대와 상처를 모두 껴안은 채로도 여전히 누군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 걸음을 사랑이라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가끔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며 혼자 웃는다. 언젠가는 다시 그 문을 열 수 있기를 바라며. 혹은, 누군가가 그 문 앞에 조용히 앉아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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