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던 엄마를 다시 만난 날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by The 늦기 전에

드라마에서는 오래 헤어진 부모를 다시 만나면 늘 울음부터 터진다. 서로의 얼굴을 만지고, 이름을 부르며, “정말 살아 있었구나”라고 통곡하며 말한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조금 불편했다. 왜냐하면 나는 죽은 줄 알았던 엄마를 다시 만나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의 장면은 드라마와 전혀 달랐다.



스무 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 달 뒤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상당한 빚이 남아 있다는 통지였다. 당황스러웠고 원망스러웠다. 살아서도 힘들게 하더니 떠나면서까지 이러는 건가 싶었다. 급히 상속 포기를 하러 갔지만 절차는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미성년자였고 법정대리인이 필요했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다섯 살 때 헤어진 내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급한 마음에 경찰서를 찾았다.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잠시 서류를 보더니 “동사무소 가보세요”라고 했다. 집 앞 동사무소에서 어머니의 주소와 연락처를 받았다. 한 시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십수 년 동안 생사조차 모르고 살던 사람을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더 서러웠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다음 날 전화를 걸었다.


“저… 아들입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전화기 너머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부산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서 굳이 찾지 않아도, 따로 부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얼굴과 너무 닮은 사람이 떡하니 앉아 있었으니까.


엄마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나는 울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반갑지도,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런 감정들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 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만이 차분히 남아 있었다. 너무 오래 지나버린 시간은 감정조차 무디게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사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왜 떠났는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는지. 단 한 번도 보고싶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늘 꿈꾸던, 그 기다려왔던 순간은 그렇게 현실감 없이 갑자기 다가왔고, 갖고 있던 원망 역시 시간 앞에서 이미 많이 닳아 있었다. 너무 오래 지나 날이 무뎌진 칼처럼 날카롭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우리는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과거를 따지지도 않았고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창밖을 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순간에 전달하지 못한 감정과 말들은 다시는 꺼내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이미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감정의 유효기간이 지나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늦어버린 시간은 복잡한 감정 대신 담담함을 먼저 가지고 왔다.



그래서 이 글은 감동적인 재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얼마나 많은 것을 조용히 바꿔놓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만약 그때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나는 울 수 있었을까. 아니면 더 아팠을까. 그건 이제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해야할 말에도, 느낄 수 있는 감정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는 생각보다 아주 빨리 지나간다는 것.


너무 늦지 않았다면.


— The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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