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소주 한 잔

첫 번째 술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by The 늦기 전에

어린 시절 우리 집 냉장고 한구석에는 언제나 먹다 만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다섯 살 때 엄마는 집을 나갔고, 여러 사정 끝에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집 안에는 늘 술 냄새가 배어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술에 취해 화라도 내는 날이면 집안은 금세 뒤집혔다. 체벌이라는 이름 아래 폭언과 폭력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을 원망했고,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고등학교에 가고 덩치가 커지자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대신 대화가 사라졌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같이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를 보며 집을 벗어날 생각만 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떠났다. 여러 사정으로 먼 객지로 나가게 되었고, 한 달에 한두 번 할머니를 뵈러 올 때만 고향에 내려왔다. 그때는 집에 들어가더라도 잠만 자고 아침이 되면 다시 집을 나섰다.


집을 떠난 지 1년 정도 흐른 어느 날, 그날도 평소처럼 잠을 자기 위해 집에 들어갔다. 집안 풍경은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TV 앞에 웅크리고 앉아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평생 보아온 장면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짠했다. 굽은 허리는 더 굽어 있었고,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던 사람은 초라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집 앞에 고기나 먹으러 갈래요?”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는지 아버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밖으로 나갔다.


고깃집에 도착해 고기와 소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잔을 몇 개 드리냐고 묻기에 나는 “두 개요”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또 한 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인이 된 후, 아버지와 술을 마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잔을 채우자 아버지가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이게 우리 아들이랑 마시는 첫 번째 술이다!” 그 말과 함께 아버지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깟 고기 몇 점과 소주 한 잔이 뭐라고 저렇게 기뻐하시는지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종종 사드릴게요.” 너무 당연하게도 다시 한 잔 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두 달 뒤, 아버지는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마신 술은 부자지간이 함께 마신 첫 술이자 마지막 술이 되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을 정리하던 날, 냉장고 한구석에 또 다른 먹다 만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그 병은 여전히 절반쯤 남아 있었다. 그 병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날 고깃집에서의 잔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눈을 붉히며 말하던 그 한마디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이게 우리 아들이랑 마시는 첫 번째 술이다.”


가끔 술에 취해 거울을 보면 그때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먼 훗날 다시 만나게 된다면 소주 한 잔을 건네며 말하고 싶다.


“죄송했습니다.”


— The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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