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선생님께 쓰는 편지
가난했던 초등학생의 스승의 날 일기
내게는 강박증이라는 몹쓸 병이 있다. 가스밸브를 잠궜는지 확인하느라 몇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했고, 문이 잠겼는지 확인하느라 손잡이를 수십 번은 돌려보고서야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현대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동으로 가스밸브가 잠기고, 문이 닫히지 않았다면 알림이 온다.
이런 강박에 시달리면서 괴롭지만, 강박증이 내 인생에 도움을 주는 것도 있다. 바로 '저장 강박증'이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특히나 내 손때가 묻었다면 추억으로 생각하고 간직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일기장, 편지부터 중/고등학교 교복, 대학시절 필기노트, 군대에서 입던 전투복과 야상까지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서 학창 시절의 일기나 기록, 상장들은 남겨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대해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이 바로 나를 기억할 만한 기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기록들을 하나씩 꺼내어보며,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글들을 써볼까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스승의 날의 일이다. 나는 반장이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인 5월 15일 하루 전날 문구점에 가서 조그마한 수첩과 카네이션을 하나 샀다. 당시 하루 용돈이 300원, 한 달에 9000원이었기에,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스승의 날 아침,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그런데... 교탁 위에는 꽃바구니와 함께 많은 선물들이 올려져 있었다. 본인의 돈으로 샀는지, 부모님의 돈으로 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많은 선물들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값비싸 보이는(사실 그렇게 비싼 선물도 아니었을 텐데도) 선물들을 보니 준비한 몇 천 원짜리 수첩과 카네이션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였고, 도저히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부끄러운 마음에 가방 깊숙이 선물을 숨긴 채 풀이 죽은 채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준비를 했는데 전하지 못한 사실이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마음만이라도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일기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편지 하단에 준비했던 수첩을 테이프로 붙였다. 당시에는 일기장을 선생님께 제출하고, 선생님이 검사를 해주셨기에 그렇게 하면 선생님께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경훈이에요. 오늘은 스승의 날인데 선물 하나 못 해 드려서 죄송해요. 마음은 아파트 한 채라도 사 드리고 싶은데요. 자본이 모자라서 그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본이 맞아떨어지는 카네이션을 샀어요. 달아드리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작은 수첩도 하나 샀는데 아이들이 계속 큰 선물들을 가져와서 전해 드리지 못했어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일을 반성하는 뜻으로 그 수첩을 일기장 밑에 붙일게요. 이제 할 말이 없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만 말 줄일 게요.
오래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편지를 쓰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마음에 '수첩을 안 받아 주면 어떡하지?', '너무 보잘것없어서 창피해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겨우 용기를 내어 적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조마조마하며 일기장을 제출했고, 돌려받은 일기장에는 '부끄러운 일이지만'이라는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아래에는 선생님의 답장이 쓰여 있었다.
경훈아 선생님을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큰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거 알지? 모르면 그게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 그치? 수첩 잘 쓸게.
너무 기뻤다.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서, 준비했던 선물을 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당시에는 일기를 쓰는 것이 너무 귀찮고 싫었다. 쓰고 싶다기보다는 써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썼다. 하지만 남아있는 일기장을 보니 그때 일기를 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지나가는 어린 시절의 하루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일기를 읽고 그날을 떠올려보니, 그때의 감정과 상황이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난다. 괜히 어린 시절의 마음이 참 기특하기도 하다. 나중에 자녀가 생기면 이 일기를 보여주며 이야기해주고 싶다.
"아빠는 어릴 때 가난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착한, 속 깊은 아이였단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에는 돈보다 가치 있는 일이 많단다. 선물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