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주차 관리 요원이 된 아빠의 하루 일기(가상)

아빠가 안 써줘서 딸이 씁니다

by 할매옷장

24세 딸이 대신 쓰는 상상 속 아빠의 하루 일기입니다.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8:00 기상

눈이 떠졌다. 어제 몇 시쯤 잤더라... 기억 안 난다. 또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것을 보니 핸드폰 보다 잠들었나 보다. 맨날 6시에 일어나서 출근하던 게 인이 박혀서 7-8시면 눈이 자동으로 떠진다. 아 피곤하다.


8:30 엄마 출근길 차로 데려다 주기

집사람 출근할 때가 돼서 데려다준다.

(아빠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을 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만 보면 스윗한 남편이지만 정말 아니었는데요........ 아빠가 요즘 일하느라 많이 힘들었나 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9:00 집으로 복귀

돌아와서는 핸드폰을 합니다. 딱히 재미가 있어서 한다기보다는... 이것 말고는 할 것이 없습니다. 주로 정치, 시사, 경제, 야구 영상입니다. 가끔 숏츠에 뜨는 여행 영상을 보기도 합니다.


10:00 아침 식사

아침을 빨리 먹으면 배가 빨리 고파져서 요즘은 아침을 늦게 먹습니다. 어차피 뜨거운 음식보다 식은 음식을 좋아해서 괜찮습니다.

(아빠는 자타공인 고양이 혀입니다. 방금 한 뜨듯한 밥 보다 식은 밥을 좋아합니다)


10:45 출근 준비

출근 준비를 합니다. 아. 일하기 싫습니다.

매번 비슷합니다. 샤워하고 머리 감고 양치하고 옷 입으면 끝입니다.

여름엔 더워서 죽겠더니, 이제는 날이 추워져서 두꺼운 양말과 장갑이 필수입니다.

오래도록 서서 일해야 하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갑니다.

(아빠에게는 기복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일하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11:15 출근

마트로 출근을 합니다. 저는 집 근처의 한 마트에서 주차 요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진상이 있을까... 두근두근 합니다. 집에 가서 공부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네요.


11:40 마트 도착

도착해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근무 준비를 합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어서 가볍게 인사를 나눕니다.


11:55 근무 시작

준비가 끝나면 나갑니다. 마트가 꽤 큰 편이라 1층부터 옥상까지 파트를 나눠가며 근무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사람이 무지하게 많네요.

(아빠 성격상 미리 가서 준비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15:23 진상 고객 응대

...요즘은 젊은 고객들이 저를 참 난처하게 합니다. 뒷 차가 못 가게 막고 있길래 조금 비켜주라 신호를 보냈는데 "나가려고 했는데 왜 그러냐" 따집니다. 나이가 서른 즈음 돼 보이는데 저를 하대하는 듯합니다. 어디 어린...!!


휴, 의미 없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제 동년배는 말도 안 되는 진상을 부리다가도 좀 심했다 싶으면 사과도 할 줄 알고 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반박할수록 싸움이 커집니다. 그냥 어른 된 도리로 참는 것이... 상책입니다. 돈 벌려고 왔는데 이런 취급까지 당해야 할까요.


16:00 휴식 및 식사 시간

휴게 시간은 30분 남짓입니다. 마트에서 식사를 챙겨줘서 먹습니다.


18:17 가족과의 영상 통화

갑자기 외국에 있는 큰 딸에게 영상 통화가 왔습니다. 원래 일 할 때는 핸드폰을 잘 안 보는데, 갑자기 단체 영상 통화가 걸려 왔습니다. 작은 딸도 합류해서 이것저것 얘기하다 끊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아빠 근무 사진입니다... 매연이 심해서 마스크를 끼고 일하는 것 같습니다)


20:00 근무 종료

근무가 끝나고 재빠르게 환복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요즘 날이 추워서 그런지 배가 빠르게 고픕니다.


20:20 담배

일이 끝나면 무조건 담배가 생각납니다. 오늘 하루도 쉽지 않았습니다.


20:30 집 도착

집사람이 수육과 겉절이를 해줬습니다. 웬일... 이렇게까지 보통 안 챙겨주는데 웬 수육이냐고 물으니 딱히 할 만한 것이 없어서 했다고 합니다. 요즘 자주 놀러 나가더니 미안했나 봅니다.


21:00 공부 시작

이제... 전기기능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합니다. 하루 최소 5시간은 들어야 끝나는 분량인데 이 많은 걸 다 들을 수도 없고 솔직히 이해도 다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거라도 계속합니다...

딸이랑 집사람은 요즘 집 앞에서 슬로우 러닝을 합니다. 고작 20분 뛰어 놓고 힘들다고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22:30 공부 끝

이제 머리가 아파서 못 듣겠습니다. 이 정도면... 어제 만큼은 했습니다. 너무 피곤합니다.


23:00 이부자리 눕기, 숏츠 보기

누워서 핸드폰을 켭니다. 또 그다지 재밌는 것은 없지만 일단 틀어 놓습니다. 아... 양치하고 자야 하는데... Zzzz


24:00 딸이 불을 끕니다

아빠가 또 핸드폰 켜놓고 잠에 들면 딸이 불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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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빠의 하루가 끝이 납니다.




아빠의 일상에서 아주 일부 만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저는 요즘 아빠가 주차 요원 일을 하면서 많이 상냥해졌다고 느낍니다.


아빠는 요즘 '삶에 대해서 다시 배우고 있다'라고 얘기합니다.

주차장에서 수많은 진상 손님들을 대하다 보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성찰하게 된다고 합니다.

굉장히 겸손한 자세로 삶을 돌아보게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아빠가 경험하고 있는 빙산의 일각이며, 제가 이해하는 바는 그 일각의 고드름 정도입니다.


요즘 저는 무너진 현실 감각, 겸손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참 무례한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소진하고 친절한 사람에게 에너지를 덜 썼습니다.

밖에서 성과도 나오지 않는 창업을 한다고 설치느라 없어진 에너지를,

집으로 돌아와 더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온 엄마와 아빠에게 아끼느라 예민하게 굽니다.

딱 그 <폭싹 속았수다>의 금명이 같습니다.

엄마 아빠 앞에서는 뭐라도 되는 양, 떽떽거리는데 밖에서는 남한테 맞춰주느라 진땀 뺍니다.

제 됨됨이의 바닥을 보이는 순간, 일을 그르칩니다.


엄마 아빠에게 배려하고 겸손해야 제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근데 너무 어려워요.


엄마 아빠는 어떻게 그래 살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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