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 면담 기록
사건명: 질문 대 응답자
장소: 무기한 연기된 법정
참고사항: 판사는 결석. 그러나 절차는 정상 진행.
0. 입장
법정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내가 이미 패소한 사람처럼 걸었다.
의자는 많았다.
하지만 앉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질문.
질문은 앉아 있었고,
나는 서 있었다.
1. 예비 심문
질문: 이름.
응답자: (잠시 망설임) …나.
질문: 직업.
응답자: 생각하는 사람.
질문 (서류를 넘기며):
생각하는 사람?
그럼 이제부터는 “고용인”으로 기록합니다.
응답자: 왜요?
질문:
질문을 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나에게 고용된 겁니다.
2. 사실 조회
질문은 아주 예의 바르게 묻는다.
예의 바른 것들이 대개 그렇듯, 잔인하다.
질문: 당신은 왜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응답자:
행동은… 위험하니까요.
질문:
위험하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응답자:
생각에서요.
질문 (고개 끄덕임):
좋습니다.
생각에서 온 위험은
대개 영구적입니다.
3. 증거 제출
질문은 내 머릿속을 열지 않는다.
대신 가방을 연다.
그 안에는
내가 “언젠가”를 위해 모아둔 종이들이 있다.
-더 알아본 뒤에
-좀 더 준비되면
-이번 달은 아닌 것 같고
-지금은 타이밍이
-일단 안정되고
질문은 그 종이들을 한 장씩 펼친다.
그 종이들은 모두 같은 글씨체를 하고 있다.
내 글씨체.
질문:
이건 당신이 쓴 겁니까?
응답자:
네.
질문:
그럼 당신이 고용인인 것도 인정하시겠네요.
응답자:
…왜 또요?
질문:
당신은 늘 “조건”을 기다리죠.
조건이 당신의 주인입니다.
4. 면담 전환
갑자기 법정이 상담실이 된다.
법정은 언제든 상담실이 될 수 있다.
사람을 흔들기만 하면.
질문 (따뜻한 목소리):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성실해요.
응답자:
그럼요. 그래서 저는…
질문: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따뜻함이 그 순간
목을 조인다.
5. 참고인: 시간
시간이 들어온다.
시간은 늘 그렇듯, 증언을 하지 않는다.
그저 의자에 앉아 손톱을 본다.
질문:
시간, 당신은 이 피고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시간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내 앞에
한 장의 달력을 툭 떨어뜨린다.
달력에는
동그라미가 없다.
6. 참고인: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
그 다음 참고인이 들어오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소개하지 않는다.
바닥에 닿는 구두 소리가 먼저다.
냄새는 없다.
표정도 없다.
그는 말하지 않는다.
말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는 말이 모두 질문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질문조차 잠깐 침묵한다.
이 침묵의 성질이 이상하다.
사색의 침묵이 아니라
계산의 침묵이다.
그가 내 옆을 지나갈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세운다.
그건 공손함이 아니다.
공손함으로 위장한
어떤 본능이다.
7. 교차 심문
응답자:
왜 저 사람은 질문을 안 하죠?
질문이 웃는다.
처음으로 진짜 웃는다.
질문:
그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하니까요.
응답자:
그럼 저 사람은… 주인인가요?
질문:
그는 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가 질문을 받는 존재로 착각되도록
세상이 협조한다는 겁니다.
8. 판결문(요약본)
질문은 판결문을 길게 읽지 않는다.
질문은 늘 효율적이다.
판결:
피고는 “생각”을 무기처럼 들고 다녔으나
실제로는 “질문”을 주인으로 모셨다.
피고는 질문을 숭배했기 때문에
자유로웠다고 믿었으나
그 믿음이 바로 고용 계약이다.
9. 퇴장
나는 퇴장한다.
법정 밖 공기가 갑자기 현실적이다.
내 손에는 판결문이 없다.
대신
다음 질문이 있다.
나는 그 질문을 들고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글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에서 출발한 사유의 변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