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여인

by 영일이

할머니랑 벚꽃구경 갔어.
꽃보다 할머니 얼굴을 더 많이 봤지만.

벚꽃은 벚꽃이더라.
작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가로수길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흰 천자락 같았어.

이날은 비가 내렸어.
비와 함께 꽃잎이 떨어져, 꽃비가 내린 셈이었지.

빗방울 하나 잡아보려고 손을 버둥거렸는데
알고 보니, 외투 끝자락에 잎 한 장이 내내 붙어있었더라.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했게?

감사하다고 했어.
그리고 기억하겠다고 했어.

말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어.


벚나무야, 고마워.
피워줘서 너무 고마워.
내가 봤어.
하얗고 붉게 피워낸 널
내가 분명히 봤어.

그러니까.
여기, 내가 알고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히 의미 있는 거야.
피어줘서 고마워.

하고말야.

작게 마련된 공연장이 있었어.
중년 여성 가수랑, 기타 멘 남성이 노래를 불렀지.
비가 내렸고, 관객석은 텅 비어 있었지만.

노래가 있는 곳엔
귀 기울여줄 사람도 반드시 있다고.

뒤에서 아주머니 무리들이
“빗속의 여인!” 외쳤어.

가수는 이내 웃으면서
그 노래를 열창했어.
비는 점점 거세졌지.

나는 할머니 손을 끌고
무대 앞으로 갔어.
덩실거리는 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췄어.

할머니와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았어.

트렌치코트엔 금세 빗자국이 번졌고
웃음소리만큼, 박수소리만큼
발밑에 젖은 벚꽃잎들이 쌓여갔어.

그 순간 우린 빗속의 여인들이었고,
여인은 당차고 명랑했어.

죽은 남편, 백수 아들, 무소식 딸,

매일 챙겨먹는 우울증약과 치매약..

저 아닌 것들을 모두 잊자 비로소 할머니는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이 됐어.

집에 갈 때
여인은 흰 봉투를 쥐어줬고,
나는 거절하는 시늉조차 안 했어.

진심으로 감사할 마음이 있었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아니까.

집에 와선
그대로 파우치에 넣었어.

쓸 곳도 없었어.

쓸 곳도 없었어.

‘할머니가 상하’라고 적힌 흰 봉투 값만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단 걸 아니까.

내 이름은 상하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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