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마음이 닿는 그곳
회색빛 커튼이 하늘을 가리고 기다란 먹색 그림자를 만든다. 여름을 알리는 매미들의 한철 절규와도 같은 애절한 울음이 하루를 알리는 알람처럼 신선한 감각을 일깨우는 시간, 집을 나서며 산책길에서 만난 계곡 물소리, 물까치, 까마귀, 매미, 직박구리 그 밖의 이름 모를 소리가 마치 잘 섞인 비빔밥처럼 여름철 끈끈한 이 느낌에서 잠시 잊게 만든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자연의 바람, 나뭇잎, 초록풀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자연의 소리도 귓가에 스친다.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는 언제 들어도 경이롭다.
고즈넉한 낮 시간의 산책길은 평소 같으면 둘째인 딸과 나란히 산책하는 시간을 자주 갖지만, 딸아이는 지금 일 관계로 창원에서 며칠 머물고 있다. 쉬는 시간 잠깐의 짬을 내어 걸려온 딸의 목소리에 생기가 흘러나와 나 역시 기분이 가벼워진다. 내려간 김에 부산 이모댁도 들린다니 모처럼 딸에게도 힐링의 시간이 될 것이다.
딸에겐 셋이나 되는 이모가 있다. 집 가까이에는 나의 언니 그리고 부산에 사는 넷째와 막내, 무남독녀였던 엄마는 지나가는 소리처럼 하신 말씀이 나를 포함한 다섯 형제를 보며 너희는 혼자가 아니라 외롭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우린 엄마의 바람대로 늘 외로울 틈 없이 많은 에피소드를 낳으며 지내고 있다.
특히 자매사이의 밀접한 관계야 오죽하랴.
딸의 등장에 두 동생의 마음은 몹시 부산스러웠을 것이다. 직장 일로 바쁜 와중에 둘 다 휴가도 냈다고 하니 나로선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런 와중에 어제 걸려온 넷째 여동생의 흥분한 목소리 뒤로 뜬금없는 딸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는 얘기에 나 또한 궁금함의 증폭으로 마음의 귀가 더 쫑긋해졌다.
사건은 넷째의 무신경으로 생긴 넷째 남편, 즉 나에겐 제부의 생일, 그런데 제부의 생일날, 하필 그날을 아무도 모르고 무심히 저녁 시간까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제부 본인만이 쓸쓸한 조명을 받으며 서운함을 감추고 있었다고 하니. 막내 여동생도 조카가 오랜만에 내려갔다고 얼마나 잘 챙겼을지 눈에 훤하다. 막내인 다섯째도 조카바라기다 보니 외식자리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조카 챙기기에 여념이 없을 테고, 안 봐도 그림이 쭉 펼쳐지니 개그의 한 장면처럼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익살스럽고 흥 많은 그녀들의 모습이 떠올려지니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한편으론 차분한 제부의 속상한 모습도 스치며 무심한 넷째에게 제발 좀 제부 생일을 잊지 말고 챙기라는 당부를 했다. 하지만 그런 무신경의 원인을 나름 헤아려보니 내 마음 한편엔 넷째에 대한 아픔이 배어있다. 결혼과 더불어 잘 풀리지 않는 일 덕분에 마음고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넷째 여동생의 얼굴이 스친다. 지금껏 인내하며 살아오고 있는 넷째, 그 옆에서 여전히 도움을 주고 있는 막내, 그리고 답답하지만 미워할 수만 없는 제부의 모습도 같이 떠올랐다. 자신의 조카만 챙기던 넷째의 모습에 순간 서운했던지 제부의 툭 내뱉은 생일이라는 단어에 다들 순간 갑분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럭저럭 식사를 끝내고 다들 제부 눈치를 살피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 앞에 케이크와 미역국 그리고 반찬까지 배달이 되어있어서 모두 어리둥절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건 딸이 주문한 이모부의 생일상이었다. 외식자리에서 이모부의 얘길 듣는 순간 딸이 취한 행동은 휴대폰으로 케이크와 미역국을 배달시켰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제부는 늦은 시간이지만 생일 케이크의 불도 끄고 눈물 젖은 미역국도 한술 떴다고 한다. 넷째는 그렇게 그 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며 웃기만 하는데 내 마음은 헛헛하기만 했다.
작은 해프닝이 지나고 이 시간 기차를 타고 올라오고 있을 울 딸, 언제나 마음이 깊어 주변을 감동시키는 아이다. 딸아이 덕분에 설렁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니 다행이다.
저 멀리 새떼가 창공 높이 날아간다. 울 넷째의 인생에도 맑은 날만 가득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