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물들다
창 밖 벚나무 잎사귀엔 빗방울이 맺혀있다.
주적주적 내리던 비가 잠시 뚝 그치고 다시 기회를 엿보듯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잔뜩 흐려있다.
며칠 뒤면 고운 달빛이 생각나는 한가위라 모든 이들에게 복된 날이 되길 기원하며 추억을 더듬어본다.
난 한가위 날 둥실 떠있는 달빛을 사랑한다.
한가위의 달빛엔 어릴 적 그때의 정서가 어려 내 가슴속 향수로 그대로 베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휴대전화도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 머릿속엔 온갖 상상을 품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이 나이 들어 되돌아보면 삶을 살아가는 지금도 매우 소중한 나의 유년기가 아니었나 싶다.
어릴 적 난 추석이 되면 무척 설레었다. 그날은 무엇보다 동네 아이들과의 놀이가 기다려져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난 동네 아이들과 그날을 위해 아주 특별한 여러 행사를 며칠 전부터 상의하고 준비했고 우린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챙겨 온 간식을 들고 우리만의 행사를 위해 하나둘씩 우리만의 아지트로 모여들었고, 우리만의 어설픈 연극 놀이에 흠뻑 빠져 낮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연극이라고 해 봐야 장화홍련 같은 동화책 내용을 가지고 상상력을 더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극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가물가물 흐릿하기만 하다. 다만 진지한 그때의 아이들 표정만 살짝 떠오를 뿐이다.
그날 놀이 중 하이라이트는 해가 넘어갈 저녁 무렵 어슴푸레한 그 시간부터라고 할 수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여자 아이들은 낮부터 그 시간을 위해 몰래몰래 속닥속닥 '어떻게 하면 무서워 보일까'를 골똘히 생각하며 어두워질 밤을 기다렸다.
그리고 모두가 학수고대하던 놀이, 그건 호러 장르인 귀신 놀이였다. 드디어 해가 기웃 내려앉고 나면 그 시작을 알리듯 하나둘 아이들의 그림자가 다시 공터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나 또한 성급한 마음에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벗어던지고 하얀 속치마 차림으로 집 밖으로 냅다 뛰어나갔다.
그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평소엔 긴 머리카락을 한 가닥으로 묶어서 얌전하니 다니던 난 그날을 위해 기회를 엿본 아이처럼 길게 풀어헤친 머리카락, 케첩을 잔뜩 바른 입가, 턱에 받쳐진 손전등, 이렇게 만발의 준비를 끝내고 나면 다른 여자 아이들과 어둠 사이로 혼미백산 도망가는 동네 꼬마들을 쫓으며 잡으러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이 마치 퐁퐁 튕겨져 나오는 팝콘처럼 꼬마들의 그림자도 퐁퐁 머릿속 흩어져있던 동심의 과거를 소환해 온다.
귀신 담당인 나의 또래 친구들도 머리카락이 다 길어 꼬마들을 자극하기엔 안성맞춤이었으며 그 모습은 정말 괴기스러웠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기본 세 자녀 이상을 둔 집들이 많았기에 그만큼 도망가는 꼬마들의 수도 많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잡으러 가는 귀신도 그 재미는 배가 되었다. 그렇게 도망가는 아이들 중엔 세명의 내 동생도 끼어있었는데 어디로 숨었는지 그림자마저 자취를 감추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달래며 숨을 죽여야 했다. 아무리 밝은 달빛도 아무리 환한 가로등도 꼭꼭 숨어있던 꼬마들을 비추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림자마저 작게 작게 구겨 꼭꼭 숨어버렸으니까.
한가위만큼 따뜻했던 어린 그 시절, 지금도 그런 정서는 내 마음을 녹여주는 기쁨이며 나를 지켜주는 자양분이 된다. 그때의 친구들과 꼬마들은 다 뭘 하려나 새삼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