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없고 그 자리엔 투사만 있었다.
BGM: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영화 아가씨 ost 중에서.
― 중학교 2학년, 첫사랑의 이름은 역사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2학년.
가슴은 아직 어설프게 단단해지던 참이었고,
머릿속은 혼란스럽게 푸르던 계절이었다.
그는 그 계절을 똑바로 가르며 들어왔다.
하얀 셔츠, 묶이지 않은 넥타이,
그리고 ‘서울대 출신’이라는 너무도 선명한 소문.
그는 칠판에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썼다.
그 순간 나는 역사에 빠진 게 아니었다.
그 문장을 쓰는 사람의 손등에 빠졌고,
그 손등을 이끄는 어깨와,
그 어깨를 붙든 목덜미에 빠졌다.
말하자면,
나는 수업보다 그의 실루엣을 더 열심히 복습했다.
그는 매번 같은 펜을 썼고,
같은 향수를 뿌린 것 같았고,
목소리는 맑았다.
나는 그의 “좋아, 잘 봤어”라는 말에
세상의 모든 가치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을 때면,
그건 내가 지옥에 던져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선생님이었다.
남자친구였고,
그리고—
유부남이었다.
•
그 사실은 늦게 알았다.
체육대회 날, 다른 반 애가 그러더라.
“그 쌤 결혼했대. 애도 둘이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뇌가 무언가를 천천히 번역했다.
‘그는 너의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누군가의 것이다.’
‘그러니까 넌 사랑하면 안 된다.’
그런데도
나는 미련하게도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의 지적인 말투고,
그의 연필심처럼 마른 손가락이고,
그의 나른한 자기 연민이다.’
그건 욕망이 아니었다.
종교에 가까웠다.
신의 목소리를 사랑하게 된 인간 같은 거였다.
정확히 말하면,
신을 사랑하게 된 인간이 아니라,
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 가능성을 사랑한 거였다.
나는 공부를 잘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에 띄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시험을 봤고,
그가 좋아할 것 같은 책을 읽었고,
그의 말투를 흉내 내 문장을 썼다.
사랑은 그렇게 독서와 혼잣말의 형태로 내 안에 쌓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넘어서는 눈빛을 주지 않았다.
나는 그걸 안다.
그는 조심스러웠고,
나는 무서울 정도로 순수했으며,
그리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그는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공범으로 만들었다.
그가 “그건 네 착각이야”라고 한 마디만 했어도
나는 훨씬 덜 망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묵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가장 빛나는 소녀가 되었다.
•
그 뒤로 나는
비슷한 남자들만 사랑했다.
지적이고, 단정하고,
어딘가 멀고 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가까워지면 사라지고,
거리를 두면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하던 나 자신을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어리석었고, 충만했고,
그리고 아주 조금 불행했다.
그래서 아직도 기억난다.
그 사람의 칠판 글씨,
그 사람이 뚫어지게 바라보던 교과서,
그 사람의 한 번 뿐이던 미소.
나는 그의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그의 손끝 하나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는 나의 선생님이었고,
나의 신이었고,
그리고 어쩌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혼잣말을 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거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라는 구체적인 인간보다
그가 내게 있어야만 했던 위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말없이 교실에 들어올 때,
나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정돈되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마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지적인 안정감,
부드러운 거리감,
그리고
내 안의 혼란을 무시해 줄 권위를 기대했다.
그는 그 기대를
묵묵히—
무해하게—
그러나 꽤나 정확하게 충족시켰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온갖 의미로 채워 넣었다.
사랑이라든가, 운명이라든가,
혹은 구원 같은 것들로.
그러니까,
내가 사랑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있던
그 짧은 순간의 나 자신이었다.
그 감정은
차가운 물속에서 꿈꾸는 것처럼 선명했고,
현실에서 마주하면 자꾸 깨지는 거울 같았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을 반복했고, 너무 많은 감정을 허비했고,
너무 많은 문장을 썼다.
그는 그 모든 과정을
모른 채 지나갔고,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잊은 척하며 기억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그저 존재했을 뿐이다.
내가 만든 투사의 무대 위에
조용히 서 있었던 하나의 형상으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조용히 스며든
잠깐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걸 부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사랑은 없었다.
투사만 있었다.
나는 이윽고 그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대를 골라냈다. 하지만 그건 파국의 시작이었다.
내가 정신과로 가는 파국의 길을 열어준 그 사람.
그를 닮은 첫 남자친구였다.
인생에서 만약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모든 것중에 하나만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시기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다면 유의미한 변화를 맞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당신.
사랑은 한 번도 나를 구한 적이 없지만,
그 착각 속에서 나는 몇 번이고 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