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사랑을 위해 입원했어요

조용하고 소름 끼치는 손길, 그루밍에 대하여 :

by 문다정

BGM: Desplat : the angel - 영화 색, 계 ost 중

나는 이후에도 늘 비슷한 남자를 사랑했다. 지적이고, 단정하고,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

마치 유리창 너머의 풍경처럼 아름답지만 만질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 몸을 던졌다.

마치 복권을 사는 사람이 당첨의 확률보다는 당첨의 상상에 돈을 거는 것처럼.

그들을 통해 나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감정을 재현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를 알아봐 준 것만 같았던’ 선생님의 목소리.

그 불완전한 구원감을 나는 다른 남자들에게 복사해 내듯 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비슷한 결말이었다. 가깝다고 믿었지만, 결국 거절.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부정하며 무너졌다.

사랑은 실패했고, 나는 점점 더 사랑의 구조 자체를 오해하는 방식으로 망가졌다.


주지화의 반복으로 살아남은 내가 한번 그녀를 분석하고 넘어가겠다.

반복강박에 대하여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패턴을 반복강박이라 부른다.

인간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하면,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상황을 반복 재현하며 극복하려 시도한다고 한다.

나는 엄마를 통해 처음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감정”과 “버려질 수 있는 위치”를 경험했고, 그 후로도 계속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붙여보려’ 애쓴 것이다.

무서운 건 그 재현이 늘 실패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나는 치유를 원했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복습하는 감정 중독자였다. 마치 같은 꿈을 계속 꾸는 사람처럼.

이상화와 거울

생각해 보면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통해 “그런 사람에게 사랑받는 나”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적 회복을 위한 투사적 시뮬레이션이었다.

쉽게 말해, 내 자존감을 그들의 관심으로 대체하려 했던 것이다.

마치 빈 컵에 물을 계속 붓지만 밑에 구멍이 뚫려있어서 영원히 찰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들이 나를 사랑했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그저 그냥 가여운 영혼쯤이라도.

나는 그들을 통해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 믿음 하나로 나는 매번 관계에 뛰어들었고, 그 믿음이 무너질 때마다

나는 조금씩 모래성이 무너지듯 스러져갔다.

그리고 매번, 사랑은 없었다. 투사만 있었다.

그리고 반복뿐이었다.

그런 어린 날의 나에게 파멸적 존재가 다가왔다. 그는 학원 강사였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지적이었고, 말이 능숙했다. 마치 소설 속에서 나온 어른 같았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이해받는 감각을 느꼈고, 그 감각은 사랑으로 착각되기에 충분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경계를 허물었다.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혼자 사는 집 이야기를 꺼내고,

늦은 시간에 “밥은 먹었냐”라고 물으며,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따뜻함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손끝이 나의 몸을 스쳤고 “이건 네가 원한 거 아니었어? “라는 말이,

사랑과 폭력 사이의 모든 선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가 자해를 시도했고, 그래도 나는 그에게 끌려다녔다. 내 머리로는 그도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통합을 시도할 수 없었다.

1년 만에 정신과 자의입원 절차를 밟았다. 그렇게 나는 무너지기 전에 나를 스스로 병원에 가두었다.

결국 그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다. 그는 단지, 내가 아무 말도 못 할 거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그를 사랑한 게 아니다. 나는 그가 만들어준 안정적인 어른의 형상을 사랑하려고 애쓴 것뿐이다. 하지만 어른은 늘 불안정적이다. 나도 어른이다. 나는 불안정하다.

마치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지는 사람처럼, 나는 늘 실재하지 않는 것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나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완벽한 치유는 없어도, 조금씩 나아지는 건 가능할 테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랑은 투사도 재현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루밍과 권력형 착취

그루밍(Grooming)은 피해자가 ‘이 관계는 안전하다’ 혹은 ‘사랑받고 있다’고 믿게 만든 뒤, 점진적으로 경계를 침범하는 심리적 조작 행위다.

그는 나의 나이와 경험 부족, 불안정한 애착, 가정 내 돌봄 결핍을 정확히 이용했다. 마치 지도를 보듯 내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한 착취였다.


-몸이 먼저 알았던 것들

경계성 인격장애와 그루밍 피해자의 공통점은 ‘자기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 그가 내 손을 잡을 때, 그게 돌봄인지 통제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와 만난 이후 시작된 증상들 - 자해, 해리, 식욕 부진, 불면, 공황.

나는 ‘이게 사랑이었을 리 없다’는 걸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루밍의 단계별 진행

처음에는 특별함을 강조했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 “네 생각은 어른스러워.” 나는 그 말들에 취했다.

마치 오랫동안 목말랐던 사람이 단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다음에는 고립을 유도했다.

“다른 사람들은 널 이해 못 해.” “부모님한테는 말하지 마, 걱정만 끼칠 뿐이야.” 점점 나는 그에게만 의존하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정상화였다.

“이런 게 진짜 관계야.” “어른들은 다 이렇게 해.” 경계가 무너진 후에는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권력의 비대칭성

어른과 아이, 선생과 학생, 경험자와 무경험자.

이 관계에서 권력은 애초부터 평등하지 않았다. 그는 그 권력을 이용해 나의 동의를 조작했다.

진정한 동의란 거부할 권리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었다.

거부하면 버려질 것 같았고, 그를 잃으면 다시 혼자가 될 것 같았다.

피해자 비난과 자기 합리화

“내가 유혹한 건 아닐까?” “내가 원한 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계속 맴돌았다.

그루밍의 가장 잔인한 점은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임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쪽에 있다. 그는 어른이었고, 나는 아이였다. 그는 전문가였고,

나는 학습자였다. 그 구조 안에서 일어난 일들의 책임은 온전히 그에게 있었다.

회복의 시작점

병원에서 처음으로 들은 말은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였다. 그 말을 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 권위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 경계 설정의 어려움. 이런 것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진짜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는 걸.

사랑은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다. 사랑은 경계를 존중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은 두려움이 아닌 안전함 위에서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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