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같이 할래요?

by 박정원

며칠이 지나고 난 그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맘을 놓지 못했다. 전화만 하면 될 것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건다. 전화벨이 울린 후 차분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나서 좀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다. 그런 후 그에게 내일 시간이 되면 사려니숲을 산책하자고 제안을 한다.


'잘한 걸까?'


사람의 온기에 메말라 있었던 것인지 마흔 넘은 나의 마음은 오래간만에 촉촉하고 설레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참으로 어렵고, 상처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으로만 보이는 지금이기에 맘속으로 '데이트 신청'이란 단어는 지우기로 한다. 종종거리는 내 마음이 좀 탐탁지 않지만 상대가 그래도 승낙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최대한 편안한 '동생'으로의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나의 이런 많은 생각 끝에 그의 대답은


"그럴까요?"


또 침착한 대답이었다.


약속한 날.

8월 말이라 상당히 더운 날이다. 난 아침 예멘 사람들 한국어 수업이 끝나고 곧장 그를 데리러 집으로 향했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오늘은 좀 내용이 다르지 않을까 싶고 뭔가 예의를 다하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늦지 않게 가려고 했지만 5분 늦게 도착했다. 집 앞에 도착하니 벌써 그는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빌라 입구에 청바지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먼 곳을 보면서 기다리는 남자가 있었다.


"왜 벌써 나와 있어요? 제가 좀 늦었죠? 시간 약속 잘 지키려고 하는데 잘...."

"제가 그냥 먼저 나와 있었어요. 괜찮아요"


오늘은 조금은 익숙한 듯 가볍게 그의 손을 나의 어깨에 얹고 기분이 들뜬 나의 총총거리는 걸음을 애써 누르고 함께 차로 간다. 차에서 내내 우리는 어색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날씨가 덥죠?... 오늘 산책이 적당한지 모르겠어요... 괜히 더운데 같이 가자고 한 것 아닌가 좀 그러네요 "

"괜찮아요. 전 좋아요.... 제가 뱀을 무서워하거든요.. 집 근처 공원이 있는데 이번 여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누가 여름에는 공원에 뱀이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퇴근하면 집에만 있었더니 좀 답답했나 봐요.. 산책하자는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고마워요"




숲에 도착하고 우리는 숲 안으로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입구에서 좀 멈칫하더니, 숲 안쪽으로는 화장실을 만나기 어렵다고 산책 전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두리번거리니 마침 '야외 간이 화장실'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라 줄이 좀 길어 보였다. 우린 거의 초면이지만 화장실 줄을 함께 서야 하는 입장이 돼버렸다. 낯선 이에게 남자 화장실을 설명하면서 나란히 기다리기란 아주 서먹한 일이지만 오늘의 나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첫 데이트가 이렇게 이상하게 시작한다는 생각에 나머지 시간들도 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자 화장실을 설명하는 건 정말 난해했다. 내가 늘 다니던 곳도 아닐뿐더러 서서 그 뭔가를 해야 하는 어색한 곳을 뭐라 말할 거며 실내는 그렇다 치더라도 실외 간이 화장실일 경우는 더 애매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단 화장실 안을 보지 않는 한 미리 설명은 불가능했다. 우리 차례가 되고 난 안에 문을 열어 1초 만에 다 본 건지 만 건지 대충 손잡이를 잡게 해 주고 그 안을 우물쭈물 설명한다.


"그게 저.. 안에 변기가 있고.. "


이게 전부다.

그러나 그는 또 당황하는 나를 안심시키는 어조로 말한다.


"입구만 설명해 주면 돼요.. 여기인가요?"

".. 네,, 조심하세요"


그가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행동함에 난 조금 놀란다. 더 해줄 게 없는지 답이 없는 머리만 열심히 굴렸다. 다행히 일은 순조롭게 되고 난 진땀을 뺀 이곳을 빨리 나가고 싶었다. 같이 다니게 되면 이렇게 계속 화장실 앞을 서성여야 한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 곳이 전체 화장실의 몇 퍼센트일까? 이렇듯 간이 화장실 같은 경우는 더욱이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 더 필요할 텐데 이 실외 화장실은 휠체어는 들어갈 수 조차 없는 구조였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장애인 화장실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문가라도 된 듯이 온갖 생각이 계속되었고 심지어 장애인 화장실에 대한 불만과 차후 개선을 어떤 방법으로 건의해야 하는지 궁리하느라 약간 신경이 곤두서기까지 했다. 그런 나를 보고 그가 웃으며 말한다.


"많이 좋아졌죠.. 화장실을 이렇게 편하게 갈 수 있으니 말이에요"

"그런데 휠체어는 아직 못 들어가네요. 제 친구는 지체장애가 있어서 화장실 가는 게 하루에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죠. 참아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여기 숲은 올 수 있을 지나 모르겠어요"

"...."


몇 년 전, 난 장애인화장실에 청소용품을 걸어두는 것에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었다. 대걸레를 변기 위에 말려둔 것을 보았지만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다. 화장실은 우리가 더럽다 꺼리는 것은 예전일이고 이제는 쾌적하게 일을 볼 수 있도록 이용자의 인격을 존중하듯이 잘 관리되어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는데, 아직도 일부는 이런 곳이 많은 것 같다. 시각장애인에게는 모든 시설을 볼 수 없기에, 모든 것을 만져야 알 수 있음을 나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변기를 찾을 때 엉켜진 머리카락이 잡히면 얼마나 놀랄 것인가?




숲길 산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한 쌍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벤치에 앉을 때 외에는 손을 잡고 가거나 내 어깨에 손을 대고 걸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난 그의 손의 무게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차마 무겁다 말은 못 하고 손과 어깨를 계속 번갈아 가면서 걸었지만 그는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또 걸을 때 바닥이 그렇게 울퉁불퉁했는지 몰랐다. 조금만 파여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그는 평지를 걷듯이 걷게 되고 곧 패인 곳으로 발이 한껏 들어간다. 그러면 '으악'소리와 함께 관절의 충격을 내비친다. 이야기를 하면서 걷게 되면 이야기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니 길의 모양이나 장애물에 관심이 덜해 빈번히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숲을 걸으면서 여여하게 인생 이야기나 나누려는 계획이었으나 난 힐링보다는 그의 팔 주변만 열심히 탐색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내 나이 42세, 로맨틱한 데이트를 꿈꾸지는 않지만 내가 예상한 데이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나란히 걷는 건 따뜻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말대신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말의 언어 속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녹여낸 것이 '체온'이다. 그동안 난 살아오면서 왜 그 촉감을 외면하고 살았을까? 보고 듣는 것에 온갖 것을 다 맡겨버렸던 나는 촉감이 이런 존재였다는 것에 새삼 놀라 미소 짓는다. 아주 생소하지만 늘 나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그 느낌. 따뜻한 베풂.

이렇게 좋은 사람하고 얼마만의 산책일까. 난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져 그에게 맘 속에 있는 이것저것 말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뱉은 말들은 별 것 아닌 나의 상처 조각들.


"난 결혼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왜요?"

"마음에 생채기가 있어요. 그냥 끌어안고 살려고요"

"남자는 믿지 못해요. 아니 사람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함께 살아요?

"...."


2시간이 지나도록 H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이제와 하는 이야기인데 H는 그때 내가 하는 말들이 안타깝게 들리고 왠지 그 빈자리 생채기가 난 자리를 자신이 대신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에는 과분해서 바로 생각을 애써 떨궈냈다고 고백한다.)

오름까지 가면 좋겠지만 두 사람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것 치고는 괜찮은 편이라 여기고 이 이상은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서로 잠시 쉬기로 한다. 다음의 좀 더 긴 호흡의 산책을 약속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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