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시작되었다.

by 박정원


전화가 온다. 편안한 목소리 치빠(치고 빠지는)스님이시다.


“오늘 뭐 해요? 나 지금 목성에서 온 남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에요. 식사 전이면 점심 같이해요.”

“네? 목성에서 온 남자라고요? 글쎄요. 출근 전이니 점심만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처음 H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어느 행사에서 H의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의 CD를 구매하고자 그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H가 시각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으로 직접 만나러 가시는 중이셨다. 왜 그러셨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셨고 난 별 고민 없이 함께하기로 했다. 이것이 나의 인생의 결정적 만남일 줄 어찌 알았을까. 목성에서 왔다 하니 나는 온갖 그림을 다 붙이면서 만나기도 전에 나의 상상 속 그와 함께 시끌벅적한 만남을 준비했다. H가 사는 집에 다다랐을 때 나의 마음에는 꼬물꼬물 설렘이 있었고 아직 만나기 전이지만 그의 외모와 목소리, 성격까지도 벌써 나의 관념 속에서는 정해져 버렸다. 이것이 기대감일 것이다. 알지 못하는 설렘은 곧장 만남과 동시에 어느 정도 반감될 것이 예상되니,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목적지 ‘목성 빌라’에 도착했고 (그가 목성에서 온 사람이라고 한 건 단지 그가 ‘목성빌라’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나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치빠스님께서는 “가서 모시고 와요”라고 하시며 나를 보내셨다. 난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난 차에서 내려 건물 입구를 찾았다. 한 남자가 약간 오래된 빌라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난 1초 만에 견적이 나왔고, 내가 만들어놓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외모였고 키도 나보다 조금 큰 정도에 좀 어려 보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에 유독 거슬리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그가 쓰고 있던 베레모이다. 내 나이와 비슷한 것 같은데, 베레모를 쓰고 있으니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 베레모는 그의 경직된 삶을 상징하는 듯했다. 검은 카라 반소매 티셔츠, 무난한 청바지, 검은색 큰 기타 가방, 그리고 베레모……. 내 머릿속은 온통 베레모, 베레모……. 또 베레모! (나중에 알고 난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창이 달린 모자(베레모 등)는 필수품이었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 모자의 챙이 먼저 장애물에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일 우리가 결혼하고 난 후에 젊어 보이는 멋진 모자를 선물했다) 외모에 집중한 나머지 그와 인사하는 걸 놓칠 뻔했다.


나는 그에게 밝은 인사를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의 손을 잡고 계단 하나하나를 천천히 내려왔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그는 손을 잡는 것을 거절하고는 내 어깨만 대 주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약간 당황스러워하면서 나의 행동이 뭐가 거북스러웠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왠지 거절과 허용이 익숙하게 계산된 듯했다. 이렇게 뭔가 행동이 정해지면서 약간은 경직되고 어려운 관계로 변하였고, 둘 사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좁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집까지 찾아오셔서 감사합니다. 차가 멀리 있나요? ”

“아니요 바로 앞이에요.”


그는 뭔가를 눈치를 챘는지 우물쭈물 서 있는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아이한테 말하듯이 친절한 말투로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예상 밖으로 그는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난 좀 더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그를 천천히 차로 안내했고, 그는 스님과 활기찬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식사에 주변의 항구를 산책하기로 일정을 정했다.


우리는 도두항으로 가서 맛집 식당을 갔고 식사를 주문했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니 난 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했다. 눈앞에 나온 반찬은 총 6가지였고 난 나온 덮밥과 국을 다 내가 그의 입에 떠 넣어 주어야 하는 건지 몰라 그만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가 한번 웃음을 보이더니

“젓가락이 어디 있죠? 저에게 젓가락을 주시고 나와 있는 반찬의 위치를 알려주시면 되세요.”

난 얼른 젓가락을 집어주고 김치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어쩌란 말인가’ 난 또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제 식사하시면 돼요. 전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좀 신기했다. 난 밥을 먹고는 있었지만, 그의 일거수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성에서 온 게 맞는구나 했다. 그는 식사하면서 알려주었다. 그릇의 위치를 알려주면 그 위치를 외운다고 한다. 난 신기해하면서 그의 식사하는 모습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런 낯선 풍경이 재미있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난 식사 내내 그에게 관심이 있었고 음식이 그의 입에 들어갈 때까지 뭔가를 더 해주어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고 있었다. 어찌했든 식사는 잘 진행이 되었고 오가는 재미있는 말들과 웃음 속에 그 딱딱했던 공간에 부드러운 바람이 비집고 들어와 조그만 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그를 안내할 때 나에게는 참 어색한 동작들이 많이 있었다. 얼마큼 가까이 가야 하는지, 얼마큼 설명해야 하는지, 몇 발자국을 먼저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 모든 게 다른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와 산책은 함께하고 싶었다. 요즘 나는 제주살이 3년째이지만 제주에 맘을 붙일 곳이 없어 좋은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 바람이 이루어진 걸까 내심 기대를 하면서 난 이 남자의 보폭에 맘을 놓지 않았다. 그는 계속 내 어깨와 나의 말에 의지하면서 차분히 걸었다. 그의 행동을 보면 그가 그동안 많은 이들의 어깨에 의지했던 것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걸음과 손의 느낌이었다.


우리는 도두항의 등대에 도착했다.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맑은 날이었다. 난 방파제에 올라앉고 싶었다. 그러면서 어쩐지 그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난 멀뚱멀뚱 서 있는 그에게 다가와 달라고 했고, 방파제 아래 1/3 지점에 발을 올려놔 달라고 했다. 그는 좀 당황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미소를 지으며 약간은 어린아이처럼 그 발을 딛고 한 번에 방파제에 앉았다. 멋진 호흡이었다. 하이파이브하고 싶었지만 하지는 않았다. 난 기분이 좋아 한참을 멋진 제주 하늘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청량감을 만끽했다. 딱히 뭐라 할 이야기가 없어 그냥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함께 있는 내내 주변에 대해 물어보는 것 이외에는 별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난 방파제에서 내려오려 할 때 한 번 더 장난스럽게 발 좀 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퉁명스럽게 “이런 것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면서 발을 대 주었다. 예상했던 태도가 아니라 난 멈칫했다. 다소 무례해 보이는 그의 말에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왠지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더 컸기에 바로 맘을 편안하게 돌렸다. 그도 퉁명스럽긴 했지만 이런 나의 행동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어색하지만 그러면서도 꼭 먼 여행을 같이 갈 것 같은 설렘이 있었다.


목성에서 온 남자가 어느 여행길에서 한 여행자를 만나고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다르게 서로 다른 세계의 손을 건네며 한 걸음씩 걷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걸까. 그 이치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만남은 내가 지금 여행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그 길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같다. 그와 헤어져 도서관에 도착해서도 나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고 곧 그를 또 만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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