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날이다. 도지사와 시장을 선출하는 날. 결혼 전 이날은 나에게 잠시 쉬거나 여행 가는 날이었으나 오늘은 좀 달랐다. 들썩들썩한 선거분위기가 집안 전체를 휘감은 지 오래고 오늘은 집안 한 구석에서 뉴스인지 유튜브인지 어떤 소리가 백색잡음처럼 계속 들린다. 그리고 한편에 미동도 없이 아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H를 볼 수 있었다. 벌써 결정도 다 끝난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반전이라도 있는 것일까? 난 좀 이해되지 않는 구석도 있지만 그의 집중력 덕분인지 그 무딘 나의 마음도 술렁거렸다.
길고 철저한 시간들을 뒤로하고 바로 운명의 '그날'인 것이다. 투표하는 날!
오늘, H는 나에게 투표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주었다.
H는 늘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한 달 전부터 집중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수집, 집중... 거의 독립투사의 정신으로 오늘을 준비해 온 그다. 박수 ~~~~~! 그에 비해 난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쇼핑한다는 핑계로, 집안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이틀 전 H의 브리핑을 통해 간단한 정보를 입수하고 선거의 정신에 위배, 자율성이 한참 부족한, 수동적 투표를 준비했다.
선거날 아침..
우리는 병원 일정과 시골집에 급하게 먼저 가야 할 일이 생겨서 투표는 거의 마지막 시간 '4시' 정도로 잡아야 했다. H는 불만이 있었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나의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그러면서 H는 그 사이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나를 좀 배려하면서 투표 전 남은 시간 동안 나의 한 표의 기로에 영향을 더 줄 생각으로 군침을 삼켰다고 한다. 선거에서 부부 일심동체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 나의 한 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브리핑을 했던가. 그렇다 보니 그의 기대감은 나도 충분이 이해가 된다. 분주하게 일을 처리하고 대망의 4시가 가까워 오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기다리는 내내도, 시골집에서 나의 일이 끝날 때까지 그는 온갖 뉴스와 유튜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열심히 피켓을 위로 들고 흔들고, 노래에 맞추어 율동을 하면서 한 사람의 이름을 하늘에 떨치게 하는 선거 유세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동사무소로 가는 내내 특정 후보에 관한 마지막 유세까지 펼친 후 '제주도를 살리는, 더 나아가 나라를 살리는 한 표'라며 굳은 결심을 보였다.
4시쯤, 우리는 심오한 한 표와 곁다리 나의 한 표까지 가지고 기세등등하게 동사무로로 입장한다.
"알지?"
H가 내 손을 꽉 잡는다.
"뭘?"
나는 시종일관 질문을 회피한다.
"우리가 하는 거야!"
"뭘?"
손에 태극기라도 들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비장함에 다리가 무겁기까지 했다. 투표용지를 받고 신분증을 대조하고 난 후 우리는 감독관에게 남편이 시각장애인임을 알린다. 우리는 한차례 대통령 선거를 치른 뒤라 투표의 상세한 진행을 벌써 꾀고 있었다. 능숙하게 시각장애인용 투표용지를 요구했다. 지난번에도 시각장애인이 투표하러 온다는 사실에 대해 준비가 안되었었는지 약간 당황하고 서툴게 투표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기에 당황하는 직원들에게 상세히 설명도 덧붙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H는 좀 더 비장한 표정이 되어갔다. 한 감독관이 우리를 별도로 안내를 해 주셨고 투표용지 사용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런데 이분도 시각 장애인용 투표용지의 사용법이 좀 미숙한 상태인지라 설명이 좀 애매모호한 것이 있었다. 이것저것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간 후 드디어 첫 번째 투표가 진행되었다.
드디어 시작!
그런데 벌써 우리 뒤로는 대기 5명인 상태다. 좀 전까지만 해도 1명이었는데 투표설명이 좀 길어진 탓에 그사이 5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난 보자마자 당황했다. 계속 줄 쪽을 응시하면서 사람들의 무표정보니 난감했다. 비장한 남편표정과 계속 늘어나는 줄을 번갈아 보면서 마음이 분주해지고 긴장되고 조급해 짐을 느꼈다. 얼굴도 상기되기 시작했다. 난 첫 번째 투표가 신속히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매우 커지고 있었다.
"여보.... 조금만 서두르면 안 될까요?.. 줄이..."
"어 알았어 하나만 더 여쭤봐야 할 것 같아..."
"... 으으윽..."
난 쉽게 진행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예상을 하긴 했었다. 지난번 투표에서 용지에 네모칸에 도장을 정확히 찍지 못해서 유효표인지, 무효표인지 애매하다고 아주 아쉬워한 적이 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유효표가 돼야 한다고 해서 집에서부터 이 부분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10번 넘게 했고 계속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온터라 이 모든 과정을 쉽게 대충 하지 않을 거란 것은 집에서부터 각오를 하고 온터였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뒤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감독관의 얼굴표정은 왜 나만 봐야 하는 건지 난 그의 옷자락을 '꽉'잡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
H는 냉정했다. 오직 그 한 표에 모든 것이 무시될 만큼 집중해 있었다. 아마도 그는 두 손의 거리를 이용해 그 네모칸 중앙에 아주 신중히 도장을 찍었을 것이고 접었을 때 인주가 번지는 걸 고려해서 세로로 접는 치밀함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보다 5배는 걸리는 시간을 투자했을 것이다. 나는 속이 다 타버렸고 더 이상 무엇에도 쏟을 연료가 없었다. 그가 두 번째 투표가 끝날 때쯤 나는 아주 신속하게 가장 각인된 사람들로 꽝, 꽝, 꽝! 그리고 그가 커튼을 걷고 나오는 곳으로 단걸음에 간다.
H는 투표를 마치고 투표용지를 손에 꼭 쥐고 서있다. 투표함을 찾는 것이다. 난 재빨리 그를 돕고자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대신 투표함에 넣어주겠다고 하니 그는 완고하게 뿌리친다.
"그냥 투표함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
난 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조심조심 안내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미묘한 신경전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나의 몸은 더 급해지지만 나의 욕망을 꾹 누르고 기다린다. 그의 의견이 충분히 존중되도록... 투표함 입구를 찾기 위해 우리는 또 한 번 과정을 기다린다. 그는 다시 접은 투표용지를 확인하고 왼손으로 입구의 위치를 잡고 오른손의 투표용지를 차분히 떨어뜨린다.
"..."
그의 용지가 그의 손을 벗어날 때까지 하나하나 모두 놓치지 않고 난 부동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대한민국 유권자로서 이 당당한 한 표에 나 또한 경의를 표하고 앞으로 나도 이 정치적 참여의 권리를 보다 신중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리고 그 당황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휴~~~'
그는 너무도 뿌듯해했다. 우리는 동사무소의 문을 나와 계단에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왜 한 표를 신중하게 던져야 하는지.
경험과 참여. 디 두 가지가 그의 인생에서는 쉬운 일들이 아니어서 그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한다. 나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험을 그는 너무도 소중하고 진지하게 참여한다. 많은 것들, 흔한 것들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방법이 그와 나는 조금 다름이 있었고, 다수와 상식이라는 것들에 대한 관념이 조금은 내 안에 무너짐을 느끼는 오늘이었다.
우리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내려오는 중 미소 짓는다. 나와 H의 미소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둘은 또 하나의 배움을 간직하는 중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