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자 마네킹
그해 겨울, 마네킹이 찾아왔다.
여관 출입문 앞을 여성 피의자를 대신한 마네킹이 점령했어도 노순우는 속수무책이었다. 역전여관에서 방화살인이 벌어진 지 사흘째. 사람들이 숱하게 오가는 인도에 떡하니 마네킹을 세운 경찰은, 여관 주인 노순우를 동정하기는커녕 아예 그를 마네킹 지킴이로 임명했다. 귀신 대가리 같은 가발을 뒤집어쓴, 으스스한 몰골로 쏘아보는 마네킹을 보자마자 행인들은 흠칫 놀라 주춤주춤 물러서곤 했다.
그날로 여관 영업은 볼 장 다 본 거였다. 노순우에게 마네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담당 형사는 범인이 잡히는 날까지 마네킹을 세워둘 거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네킹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관리 감독을 잘하라고 으르기를 잊지 않았다. 빌어먹을, 팔자에 없는 마네킹 관리라니, 노순우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마네킹을 대빗자루로 후려치려다 솟는 울화를 내리누르곤 했다. 방화살인 사건 현장으로 낙인찍힌 것도 억장이 무너져 내릴 판인데, 마네킹을 돌보라고?
볼수록 꼴이 가관이었다.
신장 160cm, 나이 30대 중반, 서울 말씨, 파마머리. 상기 여자는 1월 9일 23시쯤 역전여관에 성명 미상 나이 40대 중반 남자와 동반 투숙…… 피해자 신상과 인상착의를 적은 네모 판자를 목에 건 마네킹은, 검은 가발에 검은색 가죽 외투, 연분홍 블라우스에 받쳐 입은 꽃무늬 스웨터, 금색 버클 달린 허리띠, 보라색 주름치마, 검정 부츠, 왼팔에 건 연두색 핸드백만으로도, 뒷모습만은 살아있는 젊은 여성 뺨쳤다. 경찰은 마네킹과 신상이 일치하는 여성을 알거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경찰서로 연락해달라고 전화번호까지 달아놓았다.
마네킹 점검차 나온 담당 형사는 아내인지를 확인하려는 남자들 전화가 빗발친다나. 집 나간 여자들이 그토록 많은 줄 몰랐다고 혀를 끌끌 찼다. 형사는 거듭 당부했다. 마네킹을 잘 보살피라고. 마네킹을 파손하거나 분실하면 역전여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농담처럼 지껄였지만, 노순우는 거부하지 못했다. 이래저래 마네킹은 골칫덩이였다. 한창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여자가 안 됐다가도 마네킹이 하루빨리 역전여관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꿈틀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담당 형사에게도 밝혔지만, 노순우는 사건 당일 여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털벙거지를 눌러쓴 데다 묵직한 여행용 가방을 움켜쥔 남자 뒤에서 등을 보이고 선 여자 얼굴을 무슨 수로 기억하나. 그날따라 기온이 영하 10도로 곤두박질친 데다 많은 투숙객 뒤치다꺼리하느라 일찍 곯아떨어졌다. 숙박비는 제대로 받았어도 숙박부는 잠결에 엄벙덤벙 처리하고 말았다. 두 남녀가 묵은 별채 304호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졸린 눈으로 봤을망정 두 사람은 옷차림도 세련된 되다 행색이 멀쩡했다. 살인?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 그것도 방화살인을 저지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오명을 뒤집어쓴 역전여관을 언제까지 버려둘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해 안내실에서 잠을 잤던 터였다. 그날, 노순우는 덜컥 연탄가스를 들이마시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연탄가스에 혼미한 그를 깨운 이는 청자 다방 김 양이었다. 누군가 안내실 방문을 거칠게 두드려 댄다 싶은데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저씨! 아저씨! 노 씨 아저씨!” 안내실 문을 주먹으로 쾅쾅 치는 소리가 환청인 듯 귓불에 어른댔다.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와 안내실 창구를 여닫는 다급한 움직임은 느껴지는데 손발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 헤매는 참인데 방문이 덜컹 열렸다. 연탄가스가 어쩌고 해가며 부리나케 뛰어든 여자가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쌩하니 몰아쳤다. 이불을 젖히자 얼음 물벼락을 맞은 듯 찬 공기가 핥아 내린 온몸이 싸했다.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은 여자가 끌어당긴다 싶은데도 몸은 산 송장 마냥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김 양이 육박전에 버금가는 용을 쓴 다음에야 노순우는 방문턱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여관 출입문을 열고 칼바람에 스민 신선한 공기를 쐬고, 김 양이 건네준 물을 마시고 나서야 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자, 김 양이 한다는 소리가 커피 배달을 왔다가 이 꼴을 당했다는 거였다. 벽시계를 보니 열두 시 반이었다. 이렇게 늦도록 잠을 처잤나? 아저씨 연탄가스로 죽을 뻔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김 양을 다독인 다음 노순우는 상황 파악에 나섰다.
“배달? 나, 시킨 적 없는데.” 어질어질한 데다 뱃속이 메슥메슥한 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연탄가스에 취해 눈도 못 뜨고 헤맨 건 김 양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나.
“누가 전화로 주문했어요. 쌍화차 한잔하고 커피.”
“누가?”
“어떤 여자분이던데요?”
“여자?”
“네, 목소리가 차분하던데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어찌나 냉정하던지.”
“감정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