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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08. 2024

쓰는 인간

3 소설로 지은 집

안주로 과자를 씹어가며 나는 막걸리를 꾸역꾸역 마셨다. 취기가 돌자, 집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방한용 비닐을 찢고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아, 저 가로등 빛! 나는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눈에 들어온 건 언제나 그렇듯 강 건너, 아스라이 먼 주홍빛 가로등 빛이었다. 내 눈에 잡히는 건 정확히 일곱 개다. 주홍빛 점으로 콕콕 찍어낸, 한겨울 내내 몸서리치도록 눈에 머물렀던 가로등 불빛. 주홍빛이라면 따뜻함을 불러일으켜야 마땅하건만 강 건너 가로등 빛은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방도로를 따라 휘어지며 점점이 박힌 주홍빛은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딴 세상처럼 아득할 따름이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강변 집에서 영원히 붙들려있으리라는 공포에 시달렸다. 혼자 사는 데는 이골이 났음에도, 공동묘지와 이웃하며 감곡 무릉도원 골짜기 안에서도 몇 해를 살아냈으면서도, 과연 묵은 집에서 내가 살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려는 듯 쏘아대는 강 건너 가로등 빛 앞에, 내 영혼은 무참히 허물어지곤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저놈한테 졌다가는 강변 외딴집에서 못 견디고 쫓겨날까 봐, 이를 악물고 가로등 빛에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다. 놈이 풀어내는 주홍빛은 외로움이란 창날로 되살아나 나를 쿡쿡 찔러댔는데, 거기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나는 밤마다 이편과 저편 사이에 넓고 깊이 드러누운, 거대한 철판처럼 한없이 뻗어 누운 남한강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나는 앙갚음했다. 가로등 빛 한 점 한 점에 그날 잉태한 원고를 힘주어 새겨 넣는 것으로!


막걸리 한 통을 다 비운 다음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작은방에서 잠을 청해도 무탈하리라 싶었다. 술기운에 힘을 얻은 나는 작은방 문을 열었다. 넉 달 동안 바깥 공기를 쐬지 않은 골방 특유의 사람 접근을 막는 냄새가 훅 코를 찔러왔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지만, 나는 방안이 어떻게 어질러졌는지 볼 생각도 안 했고 무시해버렸다. 막걸리란 성수에 젖은 내 몸은 골방 풍경을 시시콜콜 따지기에는 무척이나 고귀한 존재였다. 지난겨울 몸만 빠져나온 이부자리가 아랫목에 그대로 깔려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취중에도 알고 있었다. 


잠바, 스웨터, 바지 따위 거치적대는 옷들을 헤치고 나는 손으로 이불을 더듬거렸다. 베개를 어루만진 손으로 겨울 이불을 들추고 고린내가 진동하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양말을 벗었던가, 티셔츠와 바지를 고스란히 입었던가. 고린내라고 했지만, 악취는 아니라고 나는 우긴다. 누가 무어라 해도, 나무가 타면서 난 연기가 찐득하니 눌어붙은 그것은, 군불 땐 방이 풍길 수 있는 고유한 군내임을 나는 안다. 


여름에 겨울 이불을 뒤집어썼건만 더운 줄을 모르겠다. 이 밤이여 어서 지나가라, 나는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고라니 소리가 귀를 스쳤던가. 논둑을 내달리는 고라니가 눈에 삼삼했다. 외딴집 골방에 처박혔건만 산과 들을 내달리고 싶은 걸까. 녀석들은 산에 깊은 계곡이 있음에도 사람 사는 곳으로 기어 내려왔다. 기어코 남한강에서 물을 먹겠다고 작심한 듯! 위험을 무릅쓰고 논을 거침없이 달리는 녀석들을 보노라면 속이 다 후련했다. 고라니와 더불어 남한강을 흐르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나를 품은 집의 허튼수작은 이튿날에도 멈추지 않았다. 전기가 끊어짐으로써,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여건이 파탄 났음을, 즉 폐가임을 보란 듯이 증명했음에도, 악착같이 기어들어 막걸리를 성수로 하룻밤을 버텨낸 내가 못마땅했던지, 집은 나를 떨쳐내려는 공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햇살이 골방 쪽문 문풍지를 파고든 아침에 나는 겨울 이부자리에서 눈을 떴다. 


성수로 육신을 정화한 탓일까, 간밤 한 차례도 깨지 않고 내처 잤다. 소원대로, 눈을 뜨자 아침을 맞이한 것이었다. 겨울 이불과 겨울옷들로 어지러운 방구석에 잠시 계절 감각을 잃었던 나는 이내 혼란을 수습하고, 집에서의 삶을 시작하자고 생수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을 축이고 눈곱을 떼고 나자 비로소 난장판인 방구석을 실감했는데, 지난겨울 집을 떠날 때와 똑같은 풍경이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오, 이런 쓰레기 구덩이에서 내가 잤다니, 그것도 막걸리를 마시고 달게 잤다니, 스스로 대견스러웠고, 언제 막걸리에 취해 낙담했던가 싶게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자, 겨울을 벗고 땀내 나는 여름을 살자! 자신을 다그친 나는, 집도 내 호소에 호응해주기를 바라며 서까래와 들보가 갈비뼈처럼 훤히 드러난 골방 천장을 향해 우아왁! 하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힘을 내자, 힘을 내자, 외딴집을 글 쓰는 집으로 만들자!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도록 집 안팎을 깔끔히 정리하자! 집이 전기가 나간 채로 방치된다면 나로서는 죽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시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 노트북을 설치하고 원고를 토해내려면 전기가 통해야 한다.


 아, 살자! 살자! 죽은 시간이 아닌 살아있는 시간을 살려면 한시라도 빨리 노트북과 마주 앉아야 했다. 그러자면 우선 뭔가를 먹어야 했다. 전기 끊긴 집에서 머무는 순간을 죽은 시간으로 판결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작 하룻밤을 잤음에도 나는 낡은 집에서 사는 방식을 되살려냈고, 부리나케 적응해나갔다. 먹어야 두뇌가 돌아갈 것 아닌가. 그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비상식량으로 사 온 라면이 있음을 흐뭇해한 나는 생수병을 집어 들었고, 골방 문턱을 넘어 부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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