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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1호

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15편

by 곰탱구리


일주일째 똑같은 꿈이다.


노숙자 늙은이가 매일 밤마다 찾아온다. 아빠의 얼굴을 하고 오기도 하고 중소기업 사장의 얼굴을 하기도 하고 본연의 얼굴로 오기도 한다. 늘 내 방문 바로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한없이 쳐다보고 있다. 가소로운 일이다. 감히 벌레주제에 동정하는 눈빛이라니. 처음에 아빠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을 때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이제 그놈의 원래 얼굴을 알게 되니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래도 꽤 성가시다. 그놈과 눈싸움을 하느라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잠이 들면 달려들어 당장 달려들어 내 목을 조를 것 같은 느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더구나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구슬픈 엄마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나를 지켜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울음소리가 커지면 나도 슬퍼져서 꿈속에서도 펑펑 울곤 한다.


다행히도 노숙자의 죽음은 자신의 실화에 의한 사망으로 빠르게 결론 나버렸다. 노숙자가 무연고 인 데다 화재로 너무 손상이 많이 되어 부검을 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경찰에서 속단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H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H는 벌레 한 마리 죽인 것이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두렵거나 겁나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 잡혀 들어가면 더 많은 천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었다. 깨닮음을 얻은 이후 아직까지 본인 손으로 구원한 천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H는 다시 천사 1호의 퇴근길을 뒤쫓기 시작했다. 임 현지 아니 천사 1호는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여 폭행과 강간을 수시로 자행하여 강제 유산을 세 번이나 했으니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후유증으로 1년이나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천사 1호는 늘 동일한 퇴근시간에 동일한 버스로 퇴근한다. 그녀가 회사가 아닌 곳을 가는 경우는 한 달에 1번 구월동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약을 타러 가는 날뿐이다. 매월 3번째 토요일에 병원을 가서 간단한 진료 및 상담 후 약국에 들러 집으로 온다. 총시간은 1시간 10분 내외.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녀의 집 주변에 CCTV가 없는 첫째 골목사거리 하은 음악학원 앞이 납치하는 데 가장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토요일 그 시간은 대낮인 데다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심할 텐데 어떻게 차에 태우지? 평일에는 절대 밤에 나오지도 않을 거고'


H는 고민에 잠겼다. 소방관이란 직책 덕분에 누구를 구해는 봤어도 납치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방법을 생각해 내기가 어려웠다. 인터넷을 아무리 찾아봐도 납치에 대한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장소만 찾으면 모든 것이 쉽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방법에 대한 고민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날짜가 하루하루 지날수록 H는 조바심에 속이 탔다. 밤에는 꿈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낮에는 소방 업무와 밀린 서류에 살리는 와중에 천사 1호에 대한 생각까지 더해지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러니 밥이 입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팀 전체 회식에서도 삼겹살 몇 점 이외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오늘도 H는 또 꿈을 꾸고 있었다. 놈들은 매일 아주 조금씩 방문 앞에서 침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에 한 발자국씩 다가온다.

'놈이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내 목이라도 조르려고 하는 걸까? 자신들의 복수를 위하여? 아니면 천사를 구원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저런 얼굴로 재촉하는 것일까? 제길 뭐가 되었건 중요한 것은 아직 천사 1호를 구원할 방법을 못 찾고 있다는 것이다. 천사 1호만 구원하고 나면 저 벌레들도 없어질 거야. 좋은 방법이 없을까?'

놈들의 새빨간 눈을 마주 바라보다 깨어났다. 아직 2시 30분 밖에 되지 않았다. 갑자기 갈증이 심하게 났다.

"제길. 드럽게 목마르네. 물이나 마셔야겠다"

H는 힘들게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냉장고는 텅 비어있었다.

'물도 하나 없네. 하긴 내가 밥 먹은 게 언제인지 나도 기억이 없으니. 근데 저건 뭐지?'


냉장고 한 구석에 언제 산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남양우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H는 그것을 마셔야 되나 마나 고민을 했다. 생수는 하나도 없고 수돗물은 먹기는 싫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집어 들어 살짝 맛을 보았다. 다행히 상하지는 않았다. 350mm 한 팩을 한 입에 벌컥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잠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지끈거리는 머리 탓에 잠이 쉬 들지 않았다.

'제길 잠도 안 오네.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30분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을 때, 갑자기 H는 배가 미친 듯이 아파옴을 느꼈다. 평소에도 유당 분리증이 있어서 우유를 잘 마시지 못했는데 한 밤중에 빈 속에 더구나 차가운 우유를 마신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화장실에서 세 번이 광풍을 겪은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H는 한참을 침대에 축 늘어져있었다. 다시 시작될 것 같은 조짐이 배에서 올라오기 시작되었다. 그제야 H는 집에 지사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급히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당이정이 몇 알 남아있었다. 약을 먹자 다행히 설사가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도감과 함께 지쳐 누워있던 H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거야. 그러면 되겠네"




이틀째 H는 하은 음악학원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천사 1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다음 주부터는 화재주의 강조기간이라 야간 대기조에 편성되기 때문에 이번 주에 어떻게든 천사 1호를 구원해야만 했다. 며칠 전 H는 반차를 내고 전철을 이용하여 천사 1호의 집에 몰래 침입했다. H는 냉장고를 열어 먹다 밀봉된 우유와 주스에 설사약을 다량 투입하였다. 이걸 먹으면 별 수 없이 약을 사러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랍을 다 뒤져서 당위정이나 그와 비슷한 약은 다 버렸기 때문에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약을 구입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우유나 주스를 한 모금도 안 마셨는지 그녀가 나오지 않았다. 참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반드시 나올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은 반드시 먹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0시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천사 1호가 급하게 H의 차를 지나쳐 박촌역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H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차의 트렁크를 열어놓고 그녀를 기다리면 되었다. 마치 차 수리를 하는 것처럼 보닛과 트렁크를 다 열어놓았다. 그리고는 차를 지나쳐 그녀가 오는 방향 쪽으로 10m 정도 내려갔다. 마치 레커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박촌 방향을 처다 보며 애타게 그녀를 기다렸다.


15분쯤 지나자 드디어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추운 날씨 탓인지 지나가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H는 담배를 빼어 물고 깊이 들이마셨다가 힘껏 내뿜었다. 연기가 바람을 타고 그녀가 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천사 1호는 흠칫하며 인상을 쓰고 고개를 숙여 H가 서 있는 곳을 멀리 떨어져 걸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담배연기가 하필이면 그쪽으로 갔네요"

H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물론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말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고 웅얼거리는 듯이 들렸다. 천사 1호는 H를 심하게 경계하며 고개를 숙여 꾸벅하고 인사하며 지나갔다. H는 천사 1호에게 다가갔다.

"아니 미안하다고요. 죄송하다고 인사까지 하는데 쳐다도 안 보고 지나가 버리네. 좀 그렇네"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그냥 가셔요"

천사 1호는 주눅 든 목소리로 어깨를 움츠리며 눈만 겨우 들어 H를 쳐다보며 말했다.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추운 날씨 탓에 인적이 끊어진 것이다. 아니 설령 있다 해도 H는 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H는 주변을 한번 쓱 보고는 뒤돌아 걸어가는 천사 1호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힘껏 후려쳤다.

'퍽', '헉' 두 가지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다. 50kg도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천사 1호의 몸뚱이가 앞쪽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아니 괜찮으세요"

H는 일부러 소리 내며 천사 1호의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정신을 잃지 않았으면 추가로 한 대 더 때리려고 얼른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H는 얼른 그녀를 뒷좌석에 태우고 문을 닫았다. 열렸던 트렁크와 본넷을 재빠르게 닫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H는 뒷좌석으로 건너가 그녀의 손과 발을 케이블 타이로 결박하고 입과 눈도 헝겊으로 가린 뒤 차 뒤쪽 상부 손잡이에 묶어버렸다. 그녀가 약국에서 나온 것은 아마도 약국이나 사거리 CCTV에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바로 사거리 쪽으로 차를 몰고 나가면 용의 차량이 될 가능성이 많기에 일부러 다른 차량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H의 자동차는 짙은 선팅으로 인해 가까이 와서 들여다보기 전에는 안의 상황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밤에는 거의 안 보이기에 H는 30분 정도 느긋하게 차에서 기다렸다.


10대 이상의 차량이 지나가고 나서야 H는 박촌역 쪽으로 차량을 몰고 나갔다. 충격이 커서였는지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천사를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H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격하게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소리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이러면 안 돼. 진정해. 큰 일을 치러야 하는데 이러면 곤란해'

H는 자신을 달래고 얼렀다. 다행히도 심장은 조금 안정되었다. 그러나 울렁이는 감정은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박촌역에서 남동구 석산로의 재개발 지역까지는 35분이면 충분히 도달할 거리였지만 H는 서구청 쪽으로 돌아서 되도록 CCTV가 없는 이화어린이 공원 쪽을 통해 준비해 놓은 곳으로 도착하였다. 물론 중간에 천사 1호가 깨어나 두 번이나 기절시켜야 하는 수고를 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천사 1호를 방으로 옮기고 준비해 놓은 쇠사슬로 발을 채운 뒤 다시 머리를 때려 확실하게 기절을 시킨 뒤 H는 차를 몰아 인천 시청역 근처에 주차를 해놓고 다시 버스를 타고 폐가로 돌아왔다.


H가 막 2층에 올라왔을 때 천사 1호는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겨우 몸을 가누고 벽에 기대어 앉아 몸을 이리저리 꼬며 쇠사슬과 케이블 타이를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H는 그런 모습을 한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천사님! 그러면 내가 눈은 풀어줄 테니"

"음음음음"

H는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헝겊을 풀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H를 쳐다보았다. 헝겊을 풀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음음음음음"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흠~! 천사님 나도 입을 풀어주고 싶은데 그건 좀 어렵겠어. 뭐 좀 외딴곳이기는 한데 혹시라도 소리라도 지르면 내가 좀 곤란해지거든"

"음음음음"

"소리 안 지르신다고? 에이 그래도 그건 좀 그래요. 그건 그렇고 이제 천사님은 구원되셔야 할 시간이네요. 이 지긋지긋한 지상에서 해방되어 천국으로 돌아가셔야죠. 언제까지 여기 계시려고요"

"음음음음음"

"뭐 뻔한 이야기 하시려고 그러죠? 본인은 천사가 아니라느니, 살려달라느니, 나한테 왜 그러느냐는 등.... 천사님께서 아직 당신의 정체를 자각하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난 다 이해해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의 본체를. 당신은 더러운 육체를 깨고 나와야 합니다. 찬란한 날개를 달고 당신이 원래 계셨던 곳으로 다시 가셔야 돼요. 속죄의 불 속에서 깨어나 진정한 구원을 받으셔야 해요"


H는 일어나 그녀를 준비해 놓았던 책상 위로 옮기고 폐목과 비닐을 모아 그 아래 쌓아 놓았다. 그리고 영업정지로 문 닫아 놓은 정일도료에서 가져온 신나와 유성페인트를 바닥에 부었다. 바닥에 부어지는 기름을 보며 그녀의 눈은 패닉에 빠져들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으나 헝겊에 막혀 거의 새어 나오지 못했다. H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이네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천사님~! 당신은 나의 1호 천사가 될 거예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천사로 탈피되면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예요"


H는 한 손에 라이터 다른 손에는 몽둥이처럼 길게 만든 신문지 뭉치를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천사 1호는 온몸을 비틀고 다리를 버둥거리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강력하게 묶인 타이 케이블이 손목과 발목으로 파고들 뿐 의미 없는 허우적 거림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H가 라이터를 켜서 신문지에 불을 붙였을 때 임현지의 두 눈은 절망감에 서서히 회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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