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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시작

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17편

by 곰탱구리


현장은 박형사가 상상했던 것과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야~! 그 칼 버리고 여자 풀어줘. 더 이상 죄짓지 말고 순순히 자수해"

박형사가 서둘러 도착해 보니 이미 범인은 지나가는 여자를 붙잡아 목에 칼을 들이대고 후배형사와 대치하고 있었다. 여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놀라 숨을 몰아쉴 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 이 똘갱이 새끼. 칼 내려놔라 좋게 말할 때"

뒤늦게 달려온 박형사는 숨을 몰아쉬고는 천천히 총을 꺼내 놈을 겨누었다.

"선배님! 인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들 핸드폰 촬영 중이라고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선배님~! 총 내려놓으세요 제발~! 요즘 유튜브다 뭐 다해서 영상이 찍히면 크게 문제 됩니다. 징계받으실 수도 있어요"

"징계는 시발~! 한두 번이냐? 뭐 대수라고... 시발, 징계하라 그래 난 저 새끼 쏴 죽여 버릴 거니까"


형사들의 말을 듣던 묻지 마 폭행범은 칼 든 손을 떨며 박형사에게 말했다.

"경찰이 그래도 돼? 인질을 보호해야지 시발 무슨 경찰이 저래"

"난 그래. 여자하고 아이한테 나쁜 짓 하는 새끼는 용서가 안 돼. 징계 좀 받지 뭐. 니 대가리에 시원하게 구멍하나 내주고"

박형사는 총을 놈의 머리에 겨눈 채 천천히 다가갔다.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범인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이 떨려왔다. 그 떨림은 인질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게 만들었고 자신의 피를 알아차린 인질은 '악'소리와 함께 기절하며 쓰러졌다. 쓸지는 인질의 무게로 인하여 범인과 인질 간의 틈이 벌어지자 박형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총을 쏘았다.

"탕"


총소리에 놀란 범인은 뒤로 벌러덩 쓰러졌고 후배형사는 급하게 달려들어 인질을 따로 구해냈다. 박형사는 느긋하게 뒤로 쓰러진 범인의 가슴을 발로 짓밟고 일어서려는 놈의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범인이 다시 뒤로 넘어져 기절하자 그제야 범인을 돌려 엎드리게 하고 수갑을 채웠다.

"팀장님~! 아니 선배님 이렇게 과격하게 체포하시면 문제 됩니다. 저번에 강간미수범도 반 죽여놔서 징계받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이러시면 진짜 곤란해지세요. 범인 인권 가지고 난리 난다고요"

"인권은 시발~! 알 게 뭐야. 실탄도 아니고 공포탄인데 뭘 어쩌라고? 범인 잡았으면 됐잖아. 인질도 무사하고. 에이씨 배고프네. 얼른 서로 데리고 가자. 가서 설렁탕이나 하나 시켜 먹자고"

"하~! 정말 미치겠어요 팀장님 때문에"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구월동 화재사건은 뭔가 찜찜해. 왠지 가분이 좋지 않아. 시발 다 지나간 거 어쩔 수는 없지만 또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든 단 말이야... 에라 모르것다.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뭐..."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불만 붙이면 된다.

H의 두 손은 흥분으로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천사 1호는 그런 H의 손을 보며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 댔다.

'어린 아기가 도리도리 하는 것 같군. 역시 천사라 그런지 너무 이쁘네'

천사 1호의 이쁜 얼굴에 H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실제로 이쁜 것인지 천사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H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솟아 올랐다. H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오른손에 쥐었던 라이터를 잠시 주머니에 넣고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눈물에 가득 젖은 그녀의 눈은 무서운 귀신이라도 다가오는 듯 공포에 질려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피하려고 했다.


H는 왼손에 쥐고 있던 종이뭉치를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힘주어 잡았다. 얼굴을 붙잡힌 그녀는 놀라서 온몸을 파닥거렸지만 H의 강한 힘에 몸부림이 서서히 줄어갔다. 그녀의 움직임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H는 눈을 마주 보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공포와 슬픔이 가득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흠칫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무시하였다. H는 입을 이마에 붙인 체 천천히 아래로 내려 오른쪽 눈으로 옮겨갔다.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H의 입으로 들어와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갔다. 약간의 짜고 비릿한 맛이 입에서 식도에서 그리고 위에서 꽁꽁 얼어붙은 얼음 알갱이를 먹었을 때처럼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H는 다시 왼쪽 눈으로 입을 옮겨 아까와 똑같이 눈물을 빨아먹었다. 천사 1호는 그런 그의 행동에 온몸이 굳어버려 조금도 숨소리도 못 내고 있였다.


H의 입술은 천천히 천사 1호의 코를 거쳐 입술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얼어붙었던 천사 1호가 고개를 뒤로 휙 하고 젖혀지더니 H를 잠시 쳐다보았다. H도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H는 그녀의 그런 행동에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 H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혹시 나의 입술을 통해 내가 구원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아니 분명해 구원자인 나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야'

이런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H가 눈을 살짝 감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려고 다가가는 순간 그녀가 젖혔던 머리를 이용하여 힘차게 H의 눈에 박치기를 했다. '빡'하는 소리가 방 전체를 뒤덮으며 울려 퍼졌다.


"악~! 시발, 뭐 하는 짓이야?"

H는 눈을 감싸 쥐고 뒤로 벌렁 넘어진 채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도 박치기의 여파가 컸었는지 엎드려 끙끙 앓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알싸한 아픔으로 보이지 않았던 눈의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자 엎드린 그녀의 뒷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H는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여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구원자로서 자존심에 대한 상처로 더 큰 분노가 일었다.

"씨발! 이게 무슨 짓이야? 넌 아직 구더기일 뿐이야. 내가 아니면 넌 천사가 될 수 없어. 그냥 그렇게 구더기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주제에, 감사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감히?"


H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생각할수록 수치심까지 들었다. 호흡이 점차 가빠지고 뒷머리가 뻐근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H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분노를 잠시 누르고 차근차근 그녀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고개를 흔들며 막힌 입으로 '끽끽' 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설명을 포기하고 다시 뒤로 밀어 버렸다.

"그래 너 따위가 뭘 알겠냐? 위대한 천사가 되기 전까지는 구더기일 뿐, 너를 빨리 구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래 맞아. 천사가 돼야 돼. 탈피만이 정답이야"

다시 분노가 끓어오른 H는 벌렁 넘어져 있는 그녀를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넘어진 그녀의 배를 발로 세게 차버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점점 쪼그라드는 그녀를 보며 알 수 없는 희열감이 조금씩 분노를 뛰어넘어 머릿속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씨발. 지금의 너는 구더기 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구더기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지'


4~5분 동안 H의 가혹한 폭행이 계속되었다. H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엉망이 되어버린 천사 1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온몸에는 H의 발자국이 가득했다. 몇 번의 발길질 이후 그녀의 막힌 입은 끽끽거리는 비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씨근거리던 H는 아까 땅에 버렸던 종이뭉치를 집어드고 동시에 주머니에서 라이터 꺼내 들었다.

"이제 가야 될 시간이네요, 천사 1호님! 이제 구더기 껍데기를 벗고 천사로 탈피해야 합니다."

H가 라이터를 켜고 종이에 불을 붙이자 기절한 듯 엎드려있던 여자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H를 피해 뒤쪽으로 기어갔다. 그러나 '절그럭' 소리와 함께 발에 묶여있는 쇠사슬에 막혀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극도의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장되어 불붙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천사님~! 당신은 내가 구원하는 최초의 천사님입니다. 천사 1호죠."

이 말을 마지막으로 H는 불붙은 종이 뭉치를 그녀의 몸에 던졌다. 갑작스럽게 불덩어리가 몸 쪽으로 날아오자 여자는 기겁하며 몸을 피하려고 하였으나 타이로 묶여있는 손과 발은 그녀의 몸을 불덩어리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몸에 뿌려진 신나로 인해 '확'하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몸 전체가 불덩이로 변해갔다. 그녀는 어떡해서든 불을 끄려고 엎드린 채 미친 듯이 이리저리 굴렀으나 불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폭발적으로 방 전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H가 방안에 뿌려 놓은 페인트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몸이 불 타오르자 기대에 찬 눈으로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페인트에 옮겨 붙은 불이 폭발하듯 퍼져나가자 깜짝 놀랐다.

'헉~! 이게 뭐야. 생각보다 화기가 강하네. 얼른 나가야겠다. 이러다 나도 불 속에 갇히겠다. 아쉽지만 천사로 탈피하는 모습은 건너편 건물로 가서 봐야겠네'

"천사님~! 조금만 참으세요. 곧 아름답게 탈피하실 거니까"

이 말을 마지막으로 H는 방문을 향해 급하게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방안을 이리저리 뒹굴던 불덩어리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던 H에게 달려들었다. H는 뜨거운 열기가 등을 덮치는 것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큰 불덩어리 속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이미 시꺼멓게 변해 끓어오르는 두 팔이 한 덩어리가 되어 H의 눈앞에 쑥 나타났다.

"헉! 뭐야~?"


H는 기겁을 하며 공중에 팔을 휘저었다. '절걱'하는 소리와 함께 불붙은 그녀의 두 팔은 더 이상 H에게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H가 무심결에 내뻗은 팔이 그녀의 팔에 잡혀버렸다.

"아악 씨발 뭐야?"

H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불덩어리를 급히 쳐내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팔을 잡히자마자 쳐냈음에도 H의 팔에서는 수십 개의 바늘에 찔린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벗겨져 H의 팔에 달라붙은 일부의 피부 조직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H의 팔에 매어달려 그의 팔과 같이 타고 있었다. H는 기겁하며 팔에 붙은 불을 피부조직과 함께 탁탁 쳐서 털어냈다. 즉시 털어냈음에도 그녀가 잡았던 부분은 3도의 화상을 입게 되었다.


화상 입은 팔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미리 뿌려 놓았던 신나와 페인트가 상승작용으로 작용하여 불길이 불과 몇 초만에 방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날름거리는 불길을 황급히 피해 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방문을 벗어나자 외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H를 감싸 주었다. H는 다행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느꼈다. 위험한 곳에서 무사히 나왔다는 안심되는 마음으로 '휴'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H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방문 쪽을 힐끗 돌아본 순간 온몸이 얼음에 갇혀버린 것처럼 딱 멈춰 버릴 수밖에 없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공포감에 뒷머리 쪽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이 온몸에 오돌토돌하게 돋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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