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18편
"야 이성균! 또 20분이나 늦게 오면 어떻게 하냐? 최소한 10분 전까지는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미안 미안! 그래서 미리 전화했잖아. 진상 때문에 조금 늦을 거라고. 좀 봐줘라. 내일은 20분 일찍 올게"
성균이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생활비에 보탤 돈을 벌기 위해 낮에는 택배를 하고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생수 택배 중 하필이면 진상 중에 진상에게 걸려서 실랑이하느라 20분씩이나 늦게 된 것이다.
'삼재가 들었는지 요즘 정말 재수가 없는 일이 많이 생기네. 휴 힘들다'
성균이는 방금 배달되어 온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재고박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GS편의점입니다."
재고 물품 정리에 정신이 없었던 성균은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소주. 소주 한 병 줘. 소주"
"손님! 물건은 직접 가져오셔야 돼요. 물건 골라서 카운터로 가져오시면 계산해 드릴게요"
"소주. 소주 달라고 시발! 돈 여기 있어"
노인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잔뜩 꺼내 카운터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500원짜리, 100원짜리들이 카운터 위를 떼구루루 굴러 다녔다.
"아이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 도대체 나한테 왜들 그래?"
성균이는 정리하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소주 한 병을 들고 카운터로 왔다.
"여기 있어요. 빨리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저기 빈 집에서 주무시지 마세요. 얼마 전에도 한 분 거기서 주무시다가 화재로 돌아가셨어요. 괜히 이 동네에서 얼쩡거리지 마시고 꼭 쉼터라도 찾아가세요"
"시끄러워 술이나 줘. 술"
성균은 한숨을 내쉬고 소주를 내주고는 동전을 하나하나 줍기 시작하였다. 노인은 소주를 주머니에 넣고 비틀거리며 편의점을 걸어 나갔다. 동전을 다 주워 세어보니 소주 값보다 300원이 더 많았다. 잠시 갈등을 했지만 그래도 노인의 처지가 한 푼이라도 아쉬워 보여서 동전을 들고 노인을 부르며 따라 나갔다. 그 순간 건너편 개발구역의 빈집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헉~! 저거 뭐야? 불인가? 또 불난 거야?"
H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짙은 화염에 싸인 불덩어리가 눈앞으로 확 달려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하나의 불덩어리 그 자체였다. H가 놀라서 뒤로 두, 세 발자국 물러서자 쩔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는 천사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타다닥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타는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하늘로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가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 속에서 지글거리는 천사의 얼굴 가죽이 열기로 인하여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검은색도, 흰색도 다 사라져 버리고 완벽하게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실지 않은 채 H를 노려보고 있었다.
H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천사의 눈동자가 결코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인간 자체를 말살시키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온 지옥의 악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순수한 증오와 끝을 알 수 없는 원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천사는 입을 크게 벌려 무언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인간의 청각으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초고음의 주파를 내 쏟고 있었다. 분명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음에도 H는 고막이 터질 듯한 커다란 소리의 압박에 귀를 붙잡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시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널 구원해 주는 구원자라고. 넌 천사야 천사. 이 세상에서의 시련을 벗어나 천사로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넌 악마가 아니야. 왜? 왜? 도대체 왜 나를 그렇게 원망의 눈으로 보는 거야? 왜? 기뻐서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H는 천사가 내지르는 무언의 비명에 맞대응이라도 하려는 듯이 고함을 목청껏 질러 됐다. 한참을 내지르고 나니 다시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시발! 고마움도 모르고 왜 이래? 넌 천사라고. 난 그런 너를 구원하는 구원자고. 그러니 이제 보여줘. 너의 진짜의 모습을. 고운 빛으로 다시 태어나는 너의 진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천사로서의 모습을"
그때 멍하니 서 있던 천사의 몸뚱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릎이 꿇여지고 상체가 쿵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천사의 그러한 모습에 H는 오히려 마음이 진정되며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얼른 탈피를 해. 어서 천사가 되란 말이야. 너의 본모습을 찾아. 어서어서"
그녀의 몸에서 시작된 불은 바닥에 깔린 비닐과 이불에 옮겨 붙으며 삽시간에 사방을 퍼져 나갔다. 더구나 페인트까지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하자 화염은 폭발하 듯이 온 방안을 태워 나갔다. 그제야 H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가야 돼! 천사가 되는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안전이 우선이야.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여기서 죽으면 안 돼'
그때 집 밖 골목길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H는 서둘러 방을 나간 후 뒤쪽 담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담벼락이 그리 높지 않은 덕분에 H는 옆집으로 손쉽게 뛰어 넘어갈 수 있었다. H가 담을 넘어가자마자 성균이가 편의점에 있던 빨간색의 소화기를 손에 들고 대문을 발로 차서 열고 들어왔다.
여자로부터 시작된 불은 안방을 잡아먹고 어느새 거실과 이층으로 번지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악! 불이야 불! 이 작은 소화기로는 택도 없겠네. 119,119 전화 전화! 으아 전화가 어디 있는 거야?"
성균이는 소화기를 바닥에 던지고 주머니를 마구 뒤졌다. 다행히 뒷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나왔다.
"119, 119 으앙! 손가락이 안 움직여 미치겠네"
생각보다 크게 확산되어가는 불의 규모에 당황한 성균이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멀리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균이는 아마도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던 노인이 신고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땅바닥에 버렸던 소화기를 챙겨 들고 마당 구석 쪽으로 몸을 피했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들기는 했지만 이글거리는 화염 덩어리를 보자 버럭 겁이 났고 또한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변명 거리가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방 안에서 무시무시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끼아아악"
"뭐, 뭐야?"
몸이 움찔하고 목이 움츠러들 정도의 극악스러운 절규의 소리에 성균은 소화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소화기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충실하게 수직으로 낙하하여 성균의 오른쪽 엄지를 강하게 타격하였다.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솟아오르며 전두엽을 강하게 타격하는 고통에 성균은 견디지 못하고 왼발로 깽깽이를 뛰며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하였다. 성균은 바닥에 주저앉아 화끈거리는 오른발 엄지를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고통을 참으려고 고개를 뒤로 젓기는 순간 옆집 담 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흠칫 놀란 성균은 순간적으로 고통도 잊어버리고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암흑으로 덮인 옆집은 사방을 밝히고 있는 화재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보았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엄습하는 고통에 엄지발가락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옆집의 시멘트 브로크의 둥근 구멍 안에서 까만 눈동자가 활활 타는 불길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누... 누구야?"
성균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순간, 누군가 성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헉~! 뭐야 뭐야?"
기겁하며 고개를 돌려 위를 보자 붉은 모자를 쓴 소방관이 급하게 성균을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아마도 성균이 화재에 부상을 입었을 것이란 판단으로 급히 이송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휴'하는 김 빠지는 듯한 함숨소리와 함께 다시 엄지발가락에 견디기 힘든 아픔이 몰려왔다.
"학생 괜찮아? 어디 다친데 없어?"
"발가락이 아파요"
성균은 피에 젖어 있는 오른쪽 발가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소방관은 무전으로 급히 구급대를 불렀고 소방사와 같이 들어온 구급대원은 긴급히 성균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집 밖으로 이송하였다.
성균은 깽깽이로 이동하며 옆집 벽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아까 보았던 까만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고개를 이리저리 젓자 구급대원이 어디가 불편한지 물었다.
"아뇨! 아까 저쪽 담벼락 뒤에서 누군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헉~! 참 잊고 있었네요. 방 쪽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요"
"네? 그래요? 알겠습니다."
구급대원은 무전기를 통해 이 사실을 알렸고 소방사는 방 쪽을 향하여 소방수를 집중분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방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불덩어리에 휩싸여 있어 엄청난 양의 소방수에도 그 엄청난 화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화염의 소용돌이와 불을 끄려는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울러지며 아비규환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휴 시발 큰일 날 뻔했네. 그 새끼.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네.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제길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담벼락 밑에 납작 엎드렸던 H는 바지를 끌어올려 입고는 낮은 자세로 수그린 채로 그곳을 벗어 나와 미리 마련해 둔 집으로 이동하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주의를 세심하게 살펴보았지만 모든 인력이 화재 진압을 위하여 다른 곳에 모여있던 터라 두 블록이나 떨어진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H는 대문에 쳐져있는 노란색 경찰 저지선을 조심스럽게 피해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전에 노숙자를 태워 죽인 범죄현장이라 다소 위험스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의 눈을 피하기도 좋은 곳이라고 생각되었기에 다른 곳으로 바꾸지 않고 이곳을 그대로 관측용 장소로 선택하였다. 물론 이곳이 불에 타오르는 천사의 모습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했다.
부서진 가구들 중에 겨우 건진 작은 원목 수틀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망원경을 들었다. 청계천에서 20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 것이라 그런지 제법 고배율로 천사가 있는 곳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여 주었다. H는 망원경의 조종간을 이리저리 조정하여 초점을 맞추고 방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자 이제 환한 빛과 함께 탈피를 해야 해. 저 정도의 불길이라면 충분히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을 거야. 이제 보여 줘.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어서'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한 손으로 부풀어 오른 성기를 쥐어 잡고 한참을 뚫어지게 망원경 속을 살펴보던 H는 방 안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왜지? 왜 변신을 하지 않는 거지? 모든 준비를 다 갖춰 주었잖아. 불도 쇠사슬도... 뭐가 부족했던 거지? 아까 건너편 담에서 보았을 때는 분명히 천사라는 느낌이 왔었단 말이야. 그 희열감. 그 흥분감. 확실히 천사였어. 분명히 그렇게 느꼈었어. 그런데 왜? 도대체 왜? 탈피를 하지 못하는 것이지? 왜 내게 천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지?"
이미 옆집 담벼락에 숨어있을 때 두 번의 절정을 느꼈던 H의 팬티는 허연 분비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주변의 골목길에서 누군가 여러 사람들이 수근 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H는 얼른 몸을 낮추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방관과 함께 출동한 경찰들이 주변 골목을 어슬렁 거리며 순찰하고 있었다. 방치된 집의 대문을 일일이 밀어보며 플래시로 내부를 비추어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그놈에게 들켰었나 보군. 경찰들이 수색을 하는 걸 보니... 어쩌지 지금 도망가면 들키기가 쉬울 테니 그냥 여기 숨어 있는 것이 나을 듯하군?'
H는 더 이상의 관찰을 포기하고 자신의 물건들을 주섬주섬 가져왔던 가방에 주워 담았다. 관찰을 위해 이 방을 준비할 때 가져왔었던 가방이었다.
인기척이 바로 아래층에서 들렸다.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들이 드디어 이 집 앞에 도착한 것이었다.
"박형사 님! 여기는 얼마 전에 화재로 노숙자 한 명이 죽었던 곳입니다. 뭐 여기 누가 있겠어요? 재수 없게?"
"혹시 모르지 정신 나간 미친놈이 하나 숨어있을지도"
"에이 설마요. 그리고 아직 정확히 방화인지 실화인지 조차 모르는데 도망자가 있다고 단정 지으시는 건 속단 아닐까요?"
"뭐 그 대학생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뭔가 찜찜해. 가슴이 묵직한 것이 범죄의 냄새가 진하게 나"
"그래서 여길 들어가 보시려고요?"
"응 전에 발생했던 이 집의 실화도 좀 찜찜했거든, 만일 둘 다 방화사건이고 범인이 동일인이라면 이곳에 한 번쯤은 와봤을 수도 있잖아. 범인은 반드시 사건현장에 돌아오니까. 온 김에 한번 들러 보려고"
경찰의 대화를 듣고 있던 H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가슴에 들러매고 숨을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박형사는 1층의 현장을 가볍게 둘러본 후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폐가가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화재의 영향 때문인지 계단이 심하게 삐걱거렸다.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온 박형사는 두 개의 방 중 하나를 열어보기 위하여 죄 측 방향으로 걸어갔다. 방에 숨어있던 H는 특별히 몸을 감출 곳이 없자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각목 하나를 손에 쥐고 문 뒤에 바짝 붙어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삐걱삐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박형사가 문 쪽으로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H는 고민하였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자수를 할까? 그럼 그냥 단순 노숙자로 생각해 줄까? 아니야 내 신분을 확인해 보면 금방 거짓말이 들통날 텐데. 그럼 범인으로 바로 지목될 거야. 아직 잡힐 수는 없어. 두 놈 다 해치우고 도망갈까? 근데 형사라고 하던데 내가 힘으로 두 명을 제압할 수 있을까? 이런 씨발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H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박형사의 발자국 소리는 바로 문 앞까지 다가왔다. 박형사가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잡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순간 H에게 기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