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등산
아침에 문득 등산이 하고 싶어졌다. 생수 하나 사들고 집 앞에 있는 산을 찾았다. 아이와 산책 삼아 와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오늘처럼 작정하고 오기는 처음이다. 숲길을 걷는 행위에만 집중하기 위해 노래도 틀지 않고 걸었다. 역시 산은 언제 와도 좋다.
산길을 따라 걷고 있자니 옛날 추억들이 기분 좋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청춘이라고 불렸던 스물아홉, 지독한 이별 후유증으로 뭐든 하자 싶어 무작정 등산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까지 서면에 집합, 대절한 버스를 타고 전국의 산을 찾아다녔다. 지리산에서는 아침 8시부터 해가 지는 6시까지 걸었다. 겨울에 마주하는 설산에서는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이젠이라는 것을 신발에 끼고 걸었고, 함박눈이 내리는 절경 속에서 차디찬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기도 했다. 저녁 무렵 버스에서 내리면 등산화를 신은 채로 2차, 3차까지 강행군을 하고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오곤 했다. 다음날이 월요일이라는 것도 중요치 않았다. 새삼, 그때의 에너지가 그립다. 하긴 노는 것도 열심이었지만, 일도 그에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요령이 없어서 더 그랬겠지만 잘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지금은, "적당히 하자"가 슬로건이 됐다.
동네 뒷산이라고 너무 만만히 생각했나 보다. 1시간을 걸었는데 앞으로 2km를 더 가야 하다니... 오랜만에 왔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자, 아니지 마음먹고 왔으니 끝까지 가야지 하는 마음이 양갈림길이 되어 망설이게 했다. 올라오면서 머릿속에 되새기던 책의 문장들이 생각났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목표를 쪼개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하나씩 이루면서 하루하루 성공하는 경험을 쌓자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오늘의 작은 계획도 성공으로 이끌고 싶어졌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걸었다. 정상에 가서 들을 노래를 선곡하면서... 거기서 듣는 노래는 분명 맛이 다를 것이다.
열심히 걸었더니 40분 만에 김해천문대, 정상에 도착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눈을 뜨니 세상이 더 맑게 보이는 듯했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내려오는 길, 다른 길로 도전해 볼까 싶었지만 그 계획은 다음으로 미뤘다. 왔던 길을 따라 또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내려와서 보니 황당 그 자체였다. 분명 올라갔던 길 그대로 내려온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일말의 고민도 없었는데 내려와서 마주한 곳은 대학교 교정 안 어느 건물 뒤편이었다.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이 더 가까워졌다.
진정 오늘의 깨달음이다. “내가 맞다고 믿는 많은 생각과 신념들이 어쩌면 사실과 전혀 다를 수 있다. 변화를 바란다면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해 보자. 내 삶이 변화되는 또 다른 길을 마주 할지도 모른다. ”
집에 와서 씻고, 핫도그랑 송편을 단숨에 해치웠다. 평소에는 10분도 채 걷지 않는 날이 많은데,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오늘 무려 19,800보를 걸었다. 세상에 내 몸이 얼마나 놀랬을까 싶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충전이 필요할 듯해서 30분만 자려고 누웠다. 자는 도중 알람을 끄고, 일어나야지 생각까지 한 것 같은데... 화들짝 잠에서 깼다. 깨면서 어찌나 놀랬던지 짧은 순간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는 상태를 경험했다. 다행히 큰 아이 유치원 픽업 시간 10분 전이었다. 오늘 등산도, 낮잠도 몰입감 최고인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