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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n 16. 2023

참을 수 없는 당당함

너무나 당당하게 '헛소리'를 하는 당신에게

공부를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어제보다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즐거움이다. 이런 종류의 '공부'의 즐거움은 흔히들 입시 공부로 이해하는 협의의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이나 취미생활, 연구, 글쓰기 등등 보다 넓은 맥락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공부를 통해 얻는 것이 오직 즐거움만은 아니다. '서울대생 오오~' 하는 학벌에 대한 주변의 동경어린 시선에 잠기는 일이라든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용~' 하며 입시공부의 지루하고 재미없는 부분을 에둘러 이야기한다든지. 이런 나르시스트 같은 기분 말고, 공부의 부산물 가운데 하나는, 많은 것들을 참기 힘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공리주의의 슬로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모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의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맞는 말일까? 공리주의는 유익함(utility)을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도덕적이라고 보는 규범 윤리학의 한 입장이다. 따라서 유익함의 총량이 중요할 뿐 그 유익함을 누가 얼마나 분배받는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예를 들어서 철수/영희/민수/정현이 각각 50/50/50/100의 유익함을 분배받는 상황과, 10/10/10/300을 분배받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공리주의자라면 후자의 상황이 더 도덕적인 상황이라고 본다. 구성원 전체의 유익함을 모두 더했을 때 총량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자에게 '최대다수'라는 변수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별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교과서에서도 이런 식으로 어떤 이론이나 대상을 난도질하기 일쑤인데,  하물며 일상생활에서는 어떨까. 많은 사람들은, 하물며 '공부'를 꽤나 했다고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자기 주장이 마치 진리인 양 기세등등하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 수단으로서 주로 자기가 평가하는 대상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난도질하거나, 악마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곤 한다. 이런 식으로 뭔가를 평가하는 일은,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집에 들어가 샤워나 하고 푹 자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그들과 온전히 관계 맺기에는 다소 곤란하다.


'인문학은 허구를 연구하는거야!'

'종교는 정신병이야!'

'철학은 말장난이야!'

이런 헛소리를 듣고 있으려면 어지럼증이 도져서 그만 토할 것 같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인문학' '종교' '철학'이 과연 각각의 내용(content)을 담고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보통, 너무 단정적인 비난이나 비판은 그 대상을 잘 모르고 있기에 가능하다. 만화에서 잔인무도한 악당의 음울한 과거사를 풀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그가 이런 잔혹한 악당이 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독자는 악당을 보다 다층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악당을 덮어놓고 비난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이 악당은 회개하고, 아군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당당하게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면, 삶과 세계가 나름대로의 다층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이해관계와 가치관, 관습 등에 의해 어떤 '관점'이 형성되고, 많은 가치판단은 그러한 관점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주저인《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확고하게 주어진 것으로 전제된 목적에 대한 수단을 논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천적인  입장을 ‘학문적으로’ 옹호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 세계의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해소될 수 없는 투쟁 속에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의 궁극적 입장에 따라 하나는 악마가  되고, 다른 것은 신이 되므로, 각 개인은 무엇이 자기에게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 학문은 우리가 어떻게 삶을 – 외부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 계산하여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적 지식을 제공 … 삶에 대해 가능한 궁극적 입장들 은 양립할 수 없고 그들 간의 투쟁은 해결될 수 없으므로 그 입장들 간에 결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렇듯 소위 근대화 이후의 사회에서는 우리는 어떤 관점에 따라 살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그런데 특정 관점에 따라 살 것임을 결단한다는 것은, 그 관점을 위해 봉사할 것을 언명하는 한편, 동시에 여러 관점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애시당초 하나의 입장만이 있다면 '결단'이라는 행위는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뭔가 결단하기 위해서는, 경쟁하는 비전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소위 공부를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봉사하고 있는 관점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경쟁하는 비전들이 어딘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 비전들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비판/비난/칭찬/찬양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비판/비난/칭찬/찬양하는 사람 자체를 없어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뭔가를 비판/비난/칭찬/찬양할 때에는, 나의 비판/비난/칭찬/찬양과 경쟁할 수 있는 입장들이 뭐가 있을지를 염두에 두면서, 얼음판 위에 발을 떼듯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돈도 안되는 인문대학 교수들을 다 해고하고 의대/공대 재원을 확충하죠? 인문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데요?" 그럴 땐 너무 분개하지 말고, 이른바 4대 성인(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붓다)의 얼굴을 한 채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공부가 더 필요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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