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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n 28. 2023

장래의 계획 같은 건 없다

계획 없이 사는 삶에 관하여

  한국에서 태어나 처음 꺼낸 한국말은 아마 "엄마" 였으리라. 만국 공통으로 엄마를 뜻하는 단어는 "mama"에 가까운 발음을 내기에 이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다만 내가 한국어를 다 배우기도 전에 "커서 뭐가 될 거니?" 하는 물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놀라운 일이다. 그때는 이렇게 답하지 못했지만, 당시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커서 꼭 뭐가 되어야 할까요?" 이 반문을 들으면 주변 어른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할 것이다. 그때 이렇게 덧붙이리라. "성장이란 무엇일까요?" 주변 어른들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해질 것이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 나오리라. 


 이게 꼭 한국만의 오랜 역사와 전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의 유년기와 소년기와 청년기는 장래의 계획을 세울 것을 강요받는다. '장래희망' 이라는 말을 들으면, 장래에 대한 희망을 떠올리기보다는 직업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전 장래희망이 없어요" 하는 아이의 말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삶을 방황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미래에 하고 싶은 직업이랄 게 없다는 말일 뿐.


그리고 계획 세우기가 강요되는 바로 그 장래의 직업이라는 것 또한, 아이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변의 기대와 요구에 응해 결정될 때가 많다. 예컨대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라. 의사, 변호사, 교사, 대통령, 래퍼, 유튜버...등등. 아이들이 계획하는 미래란 하나같이 '성공한' 미래뿐이다. 


 여기서 성공이라는 건, 단지 얼마나 많은 돈을 받고, 얼마나 사회적으로 명성을 떨치며, 얼마나 결혼에 유리하게 될지 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누구도 굴곡진 성공을 자기의 미래로 계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사를 '장래희망'으로 삼으며, 누구도 레지던트 1년차에 피곤에 절어서 침대로 쓰러지는 의사가 될 자기를 계획하지 않는다. 유튜버를 '장래희망'으로 삼으며, 구독자 50명 남짓의 유튜버가 될 자기를 계획하지 않는다. 대통령을 '장래희망'으로 삼으며, 누구도 출마할 때마다 낙선하는 정치인이 될 자기를 계획하지 않는다. 변호사를 '장래희망'으로 삼으며, 로스쿨 입시에 9수를 할 자기를 계획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의사든 유튜버든 정치인이든 변호사든, 어떤 직업을 목표로 삼든 그 과정에서 굴곡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아이 자신이나 그 부모가 상상하는 장밋빛 탄탄대로와는 전혀 다른 풍광과 마주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실상이 이렇다면, 누군가에게 '커서 뭐가 될거니?' 하고 물어보는 일은 일종의 고약한 장난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래의 계획 같은 거 없이도 잘 살고 있던 아이는'커서 뭐가 될 거니?' 하는 질문을 받고는 결국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야 만다. 미래의 계획을 세우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주변에서 집요하게 '커서 뭐가 될 거니?' 를 생애 주기마다 물어보니까. 유치원을 졸업하면 초등학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서. 그리고는 각 생애 주기별로 계획을 세우고 나면,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온 세상이 나서서 그 계획을 비웃는 거다. "하하, 대통령이 되겠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하하, 과학고에 가고 싶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하하, 서울대에 가고 싶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운 좋게(?) 청소년기까지 세워둔 탄탄대로의 계획을 다 이행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커서 뭐 될거니'의 족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취업은 어떻게 할거니?" "결혼은?" "아이는?" "아이는 어느 학교 보낼거니?" "아이 공부는 잘 하고?" 이 단계가 되면 슬슬 자기 자신도 뭔가 계획이 없는 삶에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생애 주기 전반에 걸친 '가스라이팅'의 소산이랄까.


 장밋빛 미래를 계획하고 뭔가를 목표로 삼는다면,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 좀 유리할 순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커서 뭐가 될 거니?' 에서 '뭐'가 되든 안 되든, 삶이 마냥 장밋빛일 것 같지는 않다. '뭐'가 되는 데 실패한다면 그 나름대로 온 세상이 나를 비웃는 기분일 것이고, '뭐'가 되는 데 성공하면 허무함이 엄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획 없는 삶을 계획한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그래서 운 좋게 서울대에 가겠다는 계획을 달성할 수 있었겠지. 지독한 입시경쟁에서 승자의 자리를 거머쥘 수 있었겠지. 그러나 난 내가 계획하던 '성공적인' 서울대생이 아니었다. 공부에 전념하겠다 다짐했던 나는 책보다는 소주를 가까이했다. 똑똑하고 잘난 친구들이 많을 거라 예상했던 서울대에는 머저리들이 가득했다. 누군가 서울대생(들)을 "공부만 잘하고 싸가지 없는 놈들" 이라며 비난하면, 나는 발끈하며 이렇게 반론하겠다. "공부를 잘한다뇨!"


 계획 없는 삶을 살겠다고 하여, 방종하고 탐닉하면서 통제 없이 내키는대로 살겠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대신, 나의 몰락과 죽음을 생각한다. 내일 당장이라도 몰락하고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몸뚱어리에 내가 가두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내키는대로 살기란 대단히 어려워진다. 우선 길거리에서 돌연사하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건강을 유지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적당한 건강을 유지하더라도 방에서 아사하지 않기 위해 적당한 돈을 벌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뿐이랴, 누군가로부터 원한을 사서 칼을 맞거나 법의 철퇴를 맞지 않기 위해 비교적 적법한 생활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애인으로부터 이별을 선고받고 질질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비교적 잘생긴 얼굴과 다정한 성격을 유지할 필요를 느낀다. 잘생긴 얼굴을 위해 세수와 샤워, 양치를 습관화하고, 다정한 성격을 위해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괜찮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렇듯 내가 가진 것들이 한 순간에 '엿 될' 가능성을 고려하면 내키는대로 살기란 대단히 어려워진다.


 그러니 아이에게 '커서 뭐가 될거니?' 하고 묻는 대신, 이렇게 속삭이자. "넌 이제부터 지옥같은 입시경쟁에 던져질 테고, 취업난에 허덕이게 될 거야. 지금 운동이라도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흘러내릴 뱃살 때문에 괜찮은 애인을 만날 수도 없을테고, 사탕 같은 거나 줏어먹고 있다가는 당뇨 환자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거야. 지금 예의범절을 배워두지 않으면 언젠가 너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칼을 맞을지도 모르고, 범법행위를 일삼는다면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평생 썩을지도 몰라." 혹시 아는가, 효과적으로 가스라이팅 당한 아이가 비로소 삶을 보람차게 살아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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