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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l 01. 2023

변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변화를 희망하는가

 실로 모든 사람은 변화를 꿈꾼다. 모두들 자기 자신의 변화를 꿈꾸기도 하고, 타인의 변화를 희망하기도 하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소망하기도 한다. 다시말해 그 대상과 방식은 제각각 다를지라도, 사람은 뭔가의 변화를 꿈꾼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삶의 수많은 에피소드에서 그 시발점은 모두, 무엇인가 변화에 대한 누군가의 열망 때문이었을 공산이 크다. 예컨대 불현듯 종교로 귀의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보다 더 경건한 인간으로 변화하고자 희망했을 것이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부모는, 아이의 성적에 변화가 찾아오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대통령에 출마하는 정치인은, 한국의 정치공동체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든 학부모든 대통령이든, 그 희망하는 변화에 도달하기란 실로 대단히 어렵다. 보다 경건해지겠다는 다짐은 번뇌에 쉽게 흔들리고,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애 성적은 오르지 않고, 대통령이 되어도 정치공동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내기란 어렵다. 희망하는 변화의 대상과 방식이 제각각이듯, 변화의 희망이 좌절되는 이유도 하나로 특정해 말할 수 없다. 번뇌의 수는 108가지나 된다고 하지 않은가. 희망하던 변화에 도달하는 방식은 협소한 반면, 변화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기까지의 방식은 너무나 제각각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도 그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마찬가지로, 변화를 이룩한 이들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변화에 성공하지만, 변화에 실패한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실패한다.


 그럼에도 사람은 변화를 희망한다. 이렇게 변태적일 데가 어디 있는가. 희망하는 변화에 도달하기보다는, 좌절되기가 훨씬 쉽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변화를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패배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격투기 시합에 굳이 나서는 선수와 같지 않은가. 격투기의 전설 타이슨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쳐맞기 전에는." 그러나 뻔히 좌절될 희망을 안고 변화를 기도하는 이들은, 실로 쳐맞을 계획을 갖고 링 위에 오르는 선수와도 같다. 쳐맞는 게 즐겁기라도 한 걸까? 그럴리가.


 변화의 열망이 좌절되고 세상에게 쳐맞을 것을 알면서도, 변화를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미국의 철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는, 사람(person)을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를 가진 존재로 정의한다. 프랑크푸르트에 의하면, 의지(will)란 단지 어떤 대상을 원한다(want to)거나 뭔가를 욕망하는(desire) 것이 아니다. 만약 욕망이 인간의 의지라면, '자유의지'라는 말은 실로 얼마나 공허한가! 다이어트 도중 솔솔 풍겨오는 치킨 냄새를 맡고 치킨을 욕망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의 욕망은 너무 쉽게 세상의 핵펀치로부터 K.O패 당한다. 누구나 계획이 있다, 치킨 향기를 쳐맡기 전에는.


 그러나 다이어트를 위한 의지가 충만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치킨을 욕망하지 않을테야!" 프랑크푸르트는 이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의지라고 말한다. 치킨 냄새를 맡고 치킨을 욕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치킨을 욕망하지 않기를 욕망할 수는 있다. 치킨을 욕망하지 않기를 욕망하는 이는, 치킨 냄새를 맡고도 충동적으로 치킨을 시키려는 자신의 손가락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에 의하면 이차적 욕망(second-order desire)이야말로 자유로운 의지의 정체다. 일차적 욕망은 치킨 냄새를 쳐맡는 순간 K.O패 당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인 이차적 욕망은 무려 치킨 냄새를 이겨낸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자유롭다.


 변화를 희망하는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쳐맞을 계획을 세우는 변태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쳐맞을 걸 알면서도, 그 자신의 자유를 뽐내는 이들이다. 일차적 욕망으로는 변화에 대해 실망하면서도, 동시에 이차적 욕망으로 변화를 간절히 희망한다. 한국의 정치공동체란 망해버렸다고 욕하면서도, 꾸준히 투표장으로 향하듯.  치킨을 간절히 바라면서, 동시에 날씬해질 자기를 희망하며 치킨의 유혹을 거부하듯.

 

 어떤 사람들은, 이 자유를 한껏 뽐낸 결과로, 무려 변화를 해낸다. 그리고 이들은 변화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된다. "봐, 옆집 애는 학원에 보내니까 성적이 올랐잖아. 너도 할 수 있어." "봐, 독일은 통일 했다잖아. 한국도 할 수 있어." "봐, 날씬해졌잖아. 너도 참아봐."


 그러나 희망을 갖는 게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괜히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원천적으로 달성이 불가능한 희망도 있다. 내가 느닷없이 태백산 호랑이로 변화하기를 희망한다고 해보자. 아마 이 희망을 갖는 동안 나는 상당히 불행할 것이다. 관악산 아래는 태백산만큼 산 좋고 물 좋지 않은걸.. 호랑이와 달리 나는 두 발로 걸어야 하는걸..나는 덜 익힌 고기를 먹었다가는 배탈에 시달려야 하는걸...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불가능한 변화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희망고문으로 밀어넣는다. 그 또한 인간이 가진 자유를 뽐내는 방식이겠지. 자유가 꼭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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