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게 첫눈이 되었다.
카톡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올해 처음 맞이하는 눈이었다. 그렇다면 첫눈이었을까? 아니었다. 2023년의 첫눈은 이미 10월 21일에 설악산에 내렸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4277361?sid=103) 그렇다면 첫눈이 아니라 헌 눈이라도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올해 처음 본 눈이지 않은가. 당신이 잠든 사이 설악산에서 내린 눈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눈앞에서 내리는 눈은 그 의미가 다르다.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의 매개일 수도, 실연의 아픔의 배경일 수도, 하늘에서 나리는 쓰레기일 수도, 고향의 향수일 수도 있다.
그뿐이랴, 첫눈의 의미뿐만 아니라 각자가 본 첫눈의 순간과 공간도 다르다. 눈에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는 이는 언젠가 내린 진눈깨비를 보고 '첫눈이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눈에 다소 깐깐한 기준을 들이미는 사람에게는 함박눈 정도는 와야 첫눈이라고 여길지 모르는 일이다. 설악산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은 10월 21일 내린 집 앞에 소복이 쌓인 '진정한 첫눈'을 보았을 것이고, 집 밖에 좀처럼 나가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이제야 아스팔트에 거무죽죽하게 녹아내린 첫눈을 보았다. 이 모든 순간에 각자가 첫눈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를 것이다.
첫눈이란 무엇인가. 처음을 뜻하는 '첫'과 겨울에 천천히 내리는 차가운 얼음 알갱이를 뜻하는 '눈'이 결합한 간단한 단어일진대, 첫눈은 당신과 만나는 순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 당신이 군인이라면 첫눈을 보자마자 탄식을 내뱉을 것이다. 당신이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인이라면 첫눈에 욕정이 불타오를 것이다. 첫눈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은 '첫눈'의 속성에 대한 물음임과 동시에, 당신이 '첫눈'에 두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의미기도 하다. 다시 말해 '첫눈이란 무엇인가?' 하는 말은 동시에 '(당신에게) 첫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뿐이랴, 당신이 첫눈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첫눈이 당신에게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첫눈은 당신을 쓸쓸한 겨울 나그네로 만들 수도, 겨울연가의 로맨티시스트로 만들 수도, 눈 맞으며 고요히 죽어가는 노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당신이 첫눈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첫눈이라는 심볼은 당신을 상직적(symbolic)으로 만든다.
그뿐이랴. 당신은 첫눈을 첫눈이게끔 만드는 존재기도 하다. 당신이 첫눈을 첫눈이라 여기지 않는 한 첫눈은 그저 기상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처럼, 당신이 첫눈을 첫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을 때 첫눈은 당신에게 첫눈이 된다. 내가 잠든 설악산에서 내린 첫눈은 오늘 내가 본 첫눈보다 좀 더 깨끗하고 하얬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를 첫눈이라 부르지 않는 한, 그저 10월에 일어난 한 기상이변일 뿐이다. 첫눈은 첫눈이 되지 못하고, 첫눈은 내게 첫눈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느닷없이 6월에 내린 비를 첫눈이라고 박박 우긴다고 그게 첫눈이 되는 건 아니다. 첫눈이 첫눈이라는 이름을 얻으려면 첫눈은 첫눈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첫눈다운 첫눈이 '첫눈'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첫눈은 당신에게 첫눈이 되어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 당신과 의미를 주고받기 시작할 것이다. 첫눈다운 게 뭐냐고? 글쎄,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첫눈이다!' 외칠 정도라면 첫눈다운 첫눈이겠지.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우리에게로 와서 / 첫눈이 된다.
나는 가끔 이 세상의 굉장히 많은 것들이 첫눈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다운 사랑에 '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의미를 만들어 갈 때, 사랑은 사랑이 된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희망다운 희망에 '희망'이라 이름 붙이고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 희망은 비로소 희망이 된다. 좌절이란 무엇인가? 좌절다운 좌절에 '좌절'이라 이름 붙이고, 좌절이 당신을 좌절시킬 때, 좌절은 비로소 좌절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존재 규정 자체가 당신(들)에 의존적인, 이런 구성체들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것들이 첫눈처럼 덧없이 녹아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발에 걸리적거리는 축축하고 시커멓게 물든 첫눈의 시체를 밟으며, 첫눈은 내게 첫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