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이반 일리치의 죽음』 논평
일리치의 죽음은 일견 그의 병과 함께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병이 아니었어도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으며 이미 죽어있었다. 단지 병을 통해 돌연 그것을 인지했을 뿐이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창비, 103) “모든 것이 별다른 변화 없이 아주 순조롭게 잘 흘러가는”(49)동안에도 일리치는 자각하지 못했을 뿐 착실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도 전현직 서울대생으로서 우리를 끌고 갈 고삐에 “코를 꿰기만 하면서”(45) 살아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당연한 말이지만 고삐에 끌리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모두 죽는다. 요컨대 이미 모든 사람은 살아가는 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리치는 그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생각한다. “끝난 건 죽음이야.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119) 숨을 거두는 순간에 죽음이 끝난다는 말은, 죽어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죽어가는 일 자체가 죽음이며, 죽음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비로소 끝이 난다. 삶이란 곧 죽어가는 일이며 죽어가는 일 자체가 곧 죽음이라면, 우리는 이미 죽어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화 『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로는 그의 권법인 북두신권으로 악당을 창난젓으로 만들어놓고는 이렇게 말한다. “넌 이미 죽어있다.(お前まえはもう死しんでいる。)” 그러나 반드시 북두신권에 죽도록 맞아야만 죽는 건 아니다. 필멸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사실은 당신도 나도 일리치도 죽어가고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죽어있다. 그러므로 산송장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유예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다. 송장이 어떻게 죽음을 유예하고 피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간신히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죽음을 선고하고 되새기는 일뿐이다. “나는 이미 죽어있다”고.
내가 이미 죽어있는 걸 미리 알아두면 뭐가 좋으냐고? 첫째로, 나의 죽음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북두의 권』의 명대사 “넌 이미 죽어있다”와 짝을 이루는 외마디 대사가 있다. “뭣이?!(なに?!)” 이렇듯 느닷없이 죽음을 선고받으면 누구라도 놀라고, 깜짝 놀라면 적절히 죽음을 갈무리하기도 어려워진다. 속수무책으로 죽음에 좌절하다 그 마지막 순간에 가서도 말실수를 하게 되는 일리치가 그 산증인(?)이다. 둘째로, 내가 어떻게 살아/죽어갈 수 있을지 궁리할 수 있다. 자신이 산송장인 줄 아는 산송장은 예속될 뿐인 삶을 거부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리치는 자신이 살아온 예속된 삶 전체를 “구역질나게 역겨운 것”(102)으로 여기게 되었으나, 게라심은 수발을 들면서 구역질나고 지저분한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84)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일은 단순노동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언명이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갖고 삶과 죽음에 직면할 수 있다. 당신의 삶이 실은 임종 순간 노인에게 스치는 긴 주마등이라고 생각해 보라. 이왕 죽어버린 몸뚱어리인데 불안과 두려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리치도 세상을 떠나는 순간 공포를 잊고 말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118)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보는 이는, 담담하고 용기 있게 보다 예속되지 않는 삶으로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다.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 모두 가야 할 길입지요.”(22) 소설 도입부에서는 들러리일 뿐인 게라심의 나지막한 이 말은, 다시 읽기(re-reading)을 통해 이렇게 읽힌다. 넌 이미 죽어있다, 이걸 깨닫는 건 남겨진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법”(59)이고 톨스토이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리치의 죽음을 남 일 보듯 하는 뾰뜨르의 독백으로 소설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24-1학기 서울대학교 "문학과 철학의 대화" 수업에서 과제로 작성한 논평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