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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l 08. 2024

자기긍정과 자기부정

《인사이드 아웃 2》의 '유교'적 읽기

*2024년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 2》는 괜찮은 영화다. 특히 애인과 데이트 도중 보기에는 매우 좋은 영화다. 그렇다고 서사의 구조나 연출 등이 특출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형적인 디즈니 풍 해피엔딩으로 질주하는 영화 시간 내내, 아기자기하게 의인화된 감정들이 상호작용하는 모습은, 어떤 공업적 진부함의 노스탤리지어를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진부함은 디즈니-픽사 특유의 안정감을 주고, 간질간질한 동심을 자극하여 이른바 '어른이'들을 벅차오르게 한다. 《인사이드 아웃 2》가 애인과 함께 보기에 굉장히 적합한 까닭도 다름 아닌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의 애인이 좀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필름이 돌아가고 약 4초 후에 등장하는 청소년이 되어버린 주인공 라일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느닷없이 벅차오름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은 90분간 눈물콧물을 쏙 빼고 있는 애인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 2》가 훌륭한 영화라면, 그 가장 큰 훌륭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사이드 아웃 2》가 감정을 의인화하는 방식이라든지 1편으로부터 추가된 새로운 감정들을 영화가 어떻게 조명하고 있느냐 등은 훌륭한 관람 포인트일지 모르지만,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모든 기억과 모든 감정은 소중하다는 진부한 메시지에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이 메시지만 얻을 요량으로 영화를 볼 생각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최대 의의는 주룩주룩 우는 애인 얼굴을 지그시 보는 데 있다. 대신에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인사이드 아웃 2》를 이른바 '유교'적으로 읽어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제안할 수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인간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유교' 이론들에서도 마음(心)의 문제에 깊이 천착한다.  도덕 행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조화되어야 하는가 등의 근본 질문에 대한 답을 규명하기 위해 유학자들은 마음의 문제를 상고해 왔다. 인간 마음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마음의 기능은 무엇인가? 도덕은 마음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외부로부터 학습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소위 '유교'의 질문들이다. 그리고 《인사이드 아웃》도 이러한 근본 질문과 상당히 유관한 발상 아래에서 서사와 연출을 진행시킨다. 나는 그중에서 맹자와 순자를 중심으로 《인사이드 아웃 2》를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자기부정의 순자: "나는 부족해"(I'm not good enough)


작품이 전개되는 중후반부에 불안이(anxiety)가 라일리의 마음에 만들어낸 자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족해"(I'm not good enough) 영화의 연출은 이러한 자기 결핍감으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자못 나쁜 것으로 묘사하는 듯하다. 영화의 서사 자체가 불안이의 폭거에서 시발하여 자아의 통합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에 라일리의 여러 억압된 기억들로부터 자아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나는 부족하다"는 자아도 스쳐 지나간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침내 불안이 도 라일리의 마음속 주민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자기 결핍감 자체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부족하다"는 결핍감은 꽤 건강하게 마음을 조정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다. 이러한 입장을 밀고 나갔던 사상가가 바로 이른바 성악설(性惡說)로  널리 알려져 있는 순자다. 순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사람이 선善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악(惡) 하기 때문이다. 대저 천박하면 중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협소하면 광대하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미천하면 고귀하기를 원하니, 진실로 그 안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려 들기 마련이다."(성악 편)

 '인간 본성은 악하다'는 순자의 성악설은 그 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다거나 선해질 수 없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처음 태어날 때는 도덕과는 거리가 먼 욕심과 이기심이 있으니, 그러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외부 세계에서 도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외부 세계의 도덕이란 바로 예(禮)다. 그럼으로써 선해질 수 있다는 게 순자의 생각이다.  이렇게 본다면 순자의 성악설은 자기부정의 계기에서 도덕을 인간 마음에 '채워나가는'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부족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한다. "나는 충분히 선하지 않아(I'm not good enough)" 하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순자 계통의 성악론자들이 지각(知覺)을 강조한다는 것이 영화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의 知覺 혹은 知 개념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외부 세계에 대해 분별하고 계산하는 능력을 포함한다는 것이 널리 합의되어 있다. 지각설의 메시지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는 외부 세계의 자극에 대해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 계산하고 따지는 능력이 주어져 있으므로, 인간이 자기 마음의 도덕성을 따질 때도 예(禮)에 비추어 계산하고 따져봄으로써 도덕적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각 능력의 골자는 예측과 계산에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 불안이가 모든 감정들 가운데 유일하게 미래 상황을 예측하고, 가능한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최선의 미래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순자 이론에서 知가 하는 역할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불안이가 知의 역할을 담당했을진대, 도덕행위를 따져 묻는 데 있어 판단 기준이 되는 禮가 라일리에게 부재했기 때문에 라일리는 작중 명백한 악행을 저지른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합리적 판단(i.e. 불안이, 지각)이나 자기부정("I'm not good enough")만으로는 도덕행위의 완성에 다다를 수 없다; 자기부정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합리적 판단을 통해 외부 세계의 도덕기준에 끊임없이 비추어 보는 반성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 외부의 도덕기준이 바로 예다.

 

자기긍정의 맹자: 나는 좋은 사람이야(I'm a good person)


순자와 같이 인간 본성의 이기적인 측면에서 출발하는 철학과 달리, 인간 본성의 선한 측면에서 출발하는 철학도 있다. 성선설(性善說)로 널리 알려진 맹자가 이러한 입장의 선봉에 서 있다. 앞서 성악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선설도 그 이름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맹자는 '인간 본성은 선하다'라고 말할 뿐,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선하다거나 악한 사람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본성이 선한 것과 실제로 선한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 모두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갑자기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순간적으로 본다면, 모두 두려워 놀라고 안타까워(惻隱)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마음은) 어린아이의 부모를 내밀하게 사귀려는 까닭이 아니며, 고을 붕당과 친구들에게 칭찬이 필요한 까닭도 아니고, 그 소리가 나는 것을 싫어해서도 아니다."(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에게는 계산 능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도덕적 마음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라. 누구라도 깜짝 놀라고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이 마음은 누가 알려줘서 얻은 것이거나, 마음 바깥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선천적 도덕 능력이 잠재해 있다. 그러니 이것을 긍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면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 이러한 자기 긍정의 철학을 대변하는 슬로건은 "나는 좋은 사람이야"(I'm a good person)라고 말할 수 있다. 라일리가 친구를 도왔던 경험, 차마 어쩌지 못한 마음을 품었던 기억들에서 형성된 이 믿음은 라일리의 삶을 지탱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기부정의 계기가  예(禮) 없이는 도덕행위로 나아가지 못하듯, 자기 긍정의 계기에서도 무조건적인 긍정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 영화의 초반부에 기쁨이(joy)가 긍정적인 기억으로만 자아를 구성하고 부정적인 기억들은 모두 '기억의 저편'에 유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성선설은 "인간 본성은 선하다"라고 명료하게 주장하지만, 그게 '나는 항상 좋은 사람'(I'm always good person)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긍정하고 자기 내면의 선한 씨앗을 싹 틔워야 한다는 태도적 주장에 가깝다.

그러므로 기쁨이가 라일리의 자아를 무조건적인 긍정적 기억으로만 형성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하는 시도인 것이다. 자기 긍정은 삶과 마음을 견인하는 기본적 태도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할 수는 없다. 현실의 마음속에는 악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기 긍정을 통해 더 능동적이고 더 자발적으로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품의  결말부에 라일리의 모든 자아가 통합되고 마침내 하얗게 빛나는 자아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야"(I'm a good person) 이때의 자기 긍정은 영화 초반부의 무조건적인 자기긍정이 아니다. 마음의 여러 국면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건강하게 생육하기 위해 자아가 갖는 기본적 태도로서의 자기 긍정인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21세기 미국 소녀 라일리의 마음이 순자,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 중국인들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다. 영화와 이른바 '유교'모두 마음에 관하여 속삭이지만, 시공간적 맥락은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성악설과 성선설 중 무엇이 더 '옳은' 철학인지 판단하는 것도 얼마간 무용하다. 그들은 이른바 과학적인 방법론을 갖고 인간 마음에 접근한 게 아니므로, 그 실증성을 갖고 이론을 평가하는 일이 정당한 평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 질문을 매개로 21세기 미국 소녀와 전국시대 중국 학자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만난다. 이 질문에 그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모든 대답에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오늘날에도 이렇게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대답도 아마 장래에 다시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되물어질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이렇게 본다면 이런 질문은 인간이 인간인 이상 던질 수밖에 없는, 영원한 질문(perennial question)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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