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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n 24. 2024

채움과 비움의 미학

너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

   파는 즐거움과 사는 즐거움


     중고 거래 어플을 통해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파는 재미에 들였다. 몇 년 전에 샀던 사용하지 않는 헤드셋, 노트북, 게임기나 읽지 않는 책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꼬깃한 지폐를 가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왠지 모를 후련함 같은 게 있다. 이 쾌감은 단순히 푼돈을 벌었다는 데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눈엣가시같았던 그러나 추억이 서려서 내버리고 싶지는 않은 물건을 꽤 적법한 절차로 제거한 데서 온 것인듯 하다. 필요 없어진 물건이지만 버리기는 싫은, 쓸모가 사라졌지만 쓰레기는 아닌 그런 애매한 물건들이 영혼의 노폐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노폐물을 비워내는 일 자체가 주는 일종의 쾌감이 있다. 통상의 배출에는 대개 비용이 따르는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종류의 배출은 구태여 버릴 귀찮음이 없을 뿐만아니라 무려 돈을 준다. 내 지난 날의 영혼이 서린 추억을 싸구려로 팔아넘기는 일은 정말 최고다. 

    그런 한편 물건을 구매하는 데서 오는 쾌감도 만만치 않게 강하다. 괜히 스트레스를 받거든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는 이들이 많은 게 아니다. 나도 그랬다. 그뿐이랴, 충동 구매가 주는 쾌감도 쾌감이지만 계획 구매가 주는 쾌감도 상당하다. 십수년간 정교하게 자신의 직업세계를 계획하고 조직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건강을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새벽에 한강을 한 시간 달린 후에 출근하는 21세기의 칸트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러한 이가 끝내 오랜 기간 계획한 자동차나 아파트같은 큼직한 구매를 해냈다고 상상해보라. 이러한 구매의 쾌감은, 물건이 수중에 들어오는 그 순간에도 강렬하겠지만 그 구매까지 달려나가는 일상적인 여로에서도 꽤 강렬하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하루하루 쌓여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꿈을 키우는 청년의 이야기가 괜히 클리셰가 된 게 아니다. 새로운 물건, 새로운 것이 내 수중에 굴러들어오는 체험, 그리고 그러기까지의 고될지도 모르는 과정 자체는 꽤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채움과 비움의 미학 

  

  집에 있는 물건을 파는 즐거움과 새로운 물건을 사는 즐거움을 각각 이렇게 불러 보자: 비움의 쾌감과 채움의 쾌감. 생각에 상기한 즐거움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쾌감인 같다. 그렇다고 어딘가에 특별히 더 우위가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감정이 발생하는 맥락과 내용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질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은가? 맥주를 마시는 쾌감과 소변을 보는 쾌감이 같을 수는 없다. 방에 물건을 적치하는 쾌감과 음식물 쓰레기를 갖다 버렸을 때의 쾌감이 같을 수는 없다. 인생을 건실히 쌓아 올리는 쾌감과 스스로 인생을 무너뜨리는 쾌감이 같을 수는 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을 산책하는 쾌감과 벌거벗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운동장을 달리는 쾌감이 같을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에는 삶을 채워나가는 미학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한 쪽에는 삶을 비워나가는 미학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여러모로 서로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의 섭식과 영혼의 소변은 서로 다르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이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지 않은가? 내게는 있다. 바로 널리 알려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삶-충동(Eros)과 죽음-충동(Tanatos)이 공존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에로스는 개인을 결합시키고, 가족을 결속시키며,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화해시켜 궁극적으로 하나의 인류로 만드는 생(生)의 에너지"인 반면에 "타나토스는 적개심과 증오심을 바탕으로 다른 생명체를 파괴하는 죽음의 에너지"라고.

     그러나 이 정의에 따르면 내가 체험하는 채움과 비움의 미학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궁극적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일이 생生으로, 삶을 비워나가는 일이 사死로 귀착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딱히 적개심이나 증오심이 있어서 집에 있는 추억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게 아니다. 나는 딱히 개인을 결합시키고, 가족을 결속시키며,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화해시켜 궁극적으로 하나의 인류로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착실하게 살아가는 아니다. 나는 그저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뿐이다. 삶을 채워 나가는 일이든, 비워 나가는 일이든.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는 생生과 사死라는 거대한 이분법 아래에서 내 즐거움의 본성을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삶에서 비움과 체움의 체험 모두 빠짐없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러워진 영혼의 정화 작업 


      현대인에게 삶을 채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굳이 설명하는 일도 입아픈 일이다. 자신의 인생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건강을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새벽에 한강을 한 시간 달린 후에 출근하는 21세기의 칸트를 상상해보라. '갓생' 산다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지 않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 정신력이라면 뭘 해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플랭크를 한 40분씩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토록 삶을 알차게 채워나갈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이 있는 이가 있다고? 아 정말 부럽다. 내게도 그런 체력과 정신력이 있었으면...그러나 내가 21세기 칸트를 동경하려고 글을 쓰는 아니다. 오히려 삶을 비우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가 부럽지 않은 아니다. 아, 정말 부럽다. 

    어쨌든 삶이란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채워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매우 알차고 정순貞純하게 자기 영혼을 채워나갈 것이고, 누군가는 구정물과 알코올로 자기 영혼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러나 당신과 나와 우리의 대부분은 적당히 알차고 적당히 오염된 영혼으로 삶을 채워나갈 것이다. 어디 인간 영혼만 그러겠는가. 몸도 그렇다. 당신이 아무리 질 좋은 고기를 먹더라도, 당신은 단백질과 함께 요산을 얻는다. 당신이 아무리 최고급 와인을 마시더라도, 당신은 간암에 한발 가까워진다. 실로 삶을 정순하게만 채워나가는 일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이렇게 본다면 살아가는 일은 내 영혼을 더럽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워내는 일이 필요하다. 더러워진 영혼의 정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너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

    

    내게 있어 그 더러워진 영혼의 정화 작업이란, 애인을 집에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다. 주로 심야인지라 거의 차량이 없어 도로는 뻥 뚫려있고, 나는 그 도로를 달리는 거다. 이제는 하도 오고 가느라 눈을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거리를, 황색 가로등을 누비며 달리는 거다. 데이트 내내 빌 틈이 없던 소리의 공백을 홀로 남겨진 차에 뻥 뚫어놓고, 거기에 내 일주일간의 더러워진 영혼의 오수를 들이붓는 것이다. 이것은  일주일간 더럽혀진 내 영혼을 한강변의 대로에 투석하는 작업이다. 어쩌면 그 도로변 러닝 코스를 21세기 칸트가 함께 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도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영혼을 투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인을 데려다주는 일보다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자체를 사랑하게 된 나는, 꼭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며 언젠가 극구 사양하던 애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너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는 일주일간 더러워지고 때묻은 내 영혼을 정화하는 경건한 작업이야. 데려다주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데려다주고 오는 길은 내게 중요한 일"이라고. 애인은 약간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랑 있으면 영혼이 정화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아니 사실 이렇게 말 안 했다. 가상의 대화일 뿐이다. 어쨌든 나는 이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애인과 함께 있는 일이 영혼의 섭식이라면, 야간 귀갓길 드라이브는 영혼의 소변이라고. 이 말을 듣고 그녀는 더이상 내게 추궁하기를 그만두었다. 이 글은 그녀와 21세기 칸트를 위한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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