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4-15
일정 : 2023. 10. 14-15.
여정 : Day1 삼성궁 - 저녁 - 송림공원
가을이 물드는 시월이다. 설악은 단품이 들었다는데 남쪽 동네는 아직 기다림이 필요하다. 숨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은행알 터진 냄새와 누렇게 마른 낙엽이 가을을 느끼게 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는 그리 길지 않다. 시월은 틈나는 대로 나들이를 다녀야 좋을 때다. 가을 산은 어딜 가나 알록달록 물든 풍경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지리산 자락도 그러했다.
아이의 요가 수업을 끝내고 출발했더니 해 짧아진 하루가 아쉽다. 오랜만에 찾은 하동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싶으면 시골로 가야 한다. 익어가는 벼는 논마다 색깔이 다르다. 노랗고 누렇고 샛노란 색으로 물든 논을 배경으로 주황색 감이 점점이 찍힌다. 차를 세워 길가 주인 없어 보이는 감나무 한 줄기 꺾어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시골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 익숙하고 정겨운 것은 어린 시절 시골 큰집에서 보낸 날들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덕이다.
굽이굽이 산을 향해 난 길을 따라 깊이 들어간다. 가을 냄새를 맡으며 도착한 곳은 삼성궁이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다는 곳이다. 단군신화로 시작되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전통을 역사책을 통해 배웠지만, '배달겨레의 성전'이라는 다소 종교적 색채를 띠는 소개에 괜한 반감이 들어 그간 외면해 왔던 곳이다. 다소 늦게 출발한 여정이 애매한 탓에 혼자 뚝 떨어진 그곳에 한 번 가보기로 한다. 다른 관광지와는 다른 산골짜기에 있어 일부러 찾지 않으면 평생 안 가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외길을 따라 들어간 그곳이 관광지라는 건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실감했다.
가는 내내 황금빛 들판, 주렁주렁 감나무 같은 전형적인 시골의 한적함을 즐긴 것이 이상할 정도다. 들고 나는 차들과 관광버스들 틈새에서 어렵게 주차를 하고 다소 비싼 느낌의 입장료를 낼 때까지는 지금껏 이곳을 외면했던 것이 하나도 아쉬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초입의 복닥거림을 벗어나 걸어 들어가다 보면 생각보다 큰 규모가 의외다. 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연못을 기점으로 둘레길처럼 만든 관람로가 제법 길다. 돌을 쌓아 벽을 쌓고 제단을 만든 풍경이 이색적이다. 미리 검색했던 여행 후기 말마따나 한 번쯤은 와볼 만하다.
산과 하늘로 둘러싸인 곳, 고조선의 소도를 재현했다는 삼성궁을 돌아 나오며 하늘을 본다. 산봉우리와 맞닿은 하늘 한쪽에서 밀려오는 먹구름에 비가 흩날린다. 이 돌들을 어떻게 쌓았을까 하는 궁금함 끝에 이 수도원을 만든 누군가의 신념까지 생각하게 된다. 사진 찍기 좋은 관광지가 된 곳에서도 그들의 민족 문화의 신념이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처음 터를 닦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 이제는 무엇이 되었다. 뜻이 있어도 애쓰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는 단순한 이치가 무엇을 이루게 한다.
여행지에서의 두루뭉술한 느낌이 글을 쓰는 행동을 통해 어렴풋한 형태를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계곡을 따라 외길을 달려 산을 내려온다. 왕복 2차선 굽은 산길은 성질 급한 사람에겐 수행의 공간이다. 추월하고 싶어 바짝 따라붙는 뒤차가 슬금슬금 중앙선을 넘어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우리 앞으로도 몇 대가 줄지어 내려가는 데다 굽은 길이 시야를 가려 마주 오는 차를 볼 수가 없다. 성질 급하기로는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편도 이럴 땐 여유롭다. 새 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는 유튜브를 즐겨보는 남편에게 계곡을 끼고 코너링하는 드라이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남편도 추월하지 못해 안달하는 뒤차를 보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자신이 만족스러울 테다.
이른 점심으로 간단히 햄버거를 먹고 출발한 터라 일찍 저녁을 먹기로 한다. 아무리 맛집을 찾아도 메뉴가 거기서 거기다. 하동 맛집이라는 꼬리표를 단 식당은 거의가 재첩이 주재료다. 유명한 시인도 내고, 전라도와 경상도도 가로지르는 유명세를 가진 섬진강이 재첩으로 하동을 먹여 살린다. 아이들에게 특유의 향이 나는 재첩이 입에 맞지 않을 것을 알지만 선택의 폭이 좁다. 나름 후기가 많은 식당에서 모둠 정식을 시켜 마른 김에 밑반찬으로 나온 생선을 나누어 먹인다. 아이들이 손도 안 대는 재첩 반찬과 재첩국은 모두 남편과 내 몫이다. 맛집이라고는 해도 딱히 반할 만큼은 아니지만, 뜨내기 입에 무난하니 한 끼 식사로 그만하면 됐다.
숙소에 가기는 조금 이른 시각, 해가 저물어가니 다른 곳을 찾기는 애매하다. 식당 가까운 곳에 소나무 숲이 있는 송림공원을 찾았다. 넓은 주차장, 멋들어진 소나무 숲 아래로 잔잔한 강물이 흐른다. 폭이 제법 넓은 모래밭이 인상적이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너머에 '광양'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말씨를 가진 이들이 서로 다른 동네에 산다.
남편과 아이들은 차에 있던 슬리퍼로 갈아 신고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근다. 차가운 물에 발을 넣기 싫었는데 슬리퍼가 3개밖에 없어 다행이다. 여름의 끝자락이었다면 바닷가 모래사장 같은 그곳에서 한참을 놀았을 텐데 때는 바야흐로 가을, 발끝에서 전해지는 한기에 아이들이 놀라 소리를 지른다.
짧은 물장난 끝에 공원 흔들 그네 벤치에 앉아 강 건너 전라도 땅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살짝 붙어 앉아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반갑다. 섬진강 하류의 잔잔한 물줄기 위에 저녁노을이 살짝 얹혔다. 초코가 묻은 달콤한 과자를 챙겨 들고 오길 잘했다. 배는 부르고, 입안은 달콤하고,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지 않고 느긋하게 강을 바라보며 아이들에게 오래된 단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쌍계사와 화개 장터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 장터엔~"
역시나 오래된, 화개 장터에 빠질 수 없는 그 노래 한 소절을 나지막이 불러주니 큰아이가 기겁을 한다. 사춘기가 가장 두려워한다는 '부모에 의해 유발된 부끄러움' 탓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짓궂은 남편은 더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시늉을 한다. 노랫말이 전라도로 시작하는지 경상도로 시작하는지 갑자기 헷갈리지만, 뭔들 어떠한가. 집 아닌 곳에서 집에서처럼 투닥거리는 우리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이 그저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