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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Nov 06. 2023

<무릎딱지>

엄마는 모르는 엄마 냄새

<샤를로트 문드리크 글, 올리비에 탈레크 그림, 이경혜 옮김, 한울림어린이.>



몇 년 전부터 그림책이 유행이다. 내 평생 언제나 유행은 남의 얘기인 듯 살아왔지만, 유행이 저물기 전에 한 번쯤은 관심 있게 들여다보며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려는 노력을 조금은 하고 산다. 그림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미 그림책이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깊이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진 때에 그림책을 접했다.


발 빠르고 선구적인 사람들은 어찌나 그리 많은지, 그림책과 관련된 책이나 강좌들이 이미 차고 넘치는 걸 보면 세상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언젠가 빛을 발하는 게 진리인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온 그림책이 처음에는 그리 극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감성이 메마른 건지, 이 짧은 그림책을 읽어내기도 버거울 만큼 생각이 꽉 막힌 건지, 그림이라는 예술 장르에 대해 문외한이라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유행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내 취향에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책, <무릎딱지>는 달랐다. 제목을 보면 딱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상처. 넘어져서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 빨갛게 솟아오르는 피 무늬들, 소독약을 뿌릴 때의 소름 돋는 따가움, 긁힌 자국 그대로 점점이 생긴 피딱지들. '무릎딱지'라는 글자만 읽어도 시멘트 바닥에 긁혀 쓰라린 통증이 떠오른다. 


상처가 나아가면서 간질간질한 무르팍을 손끝으로 긁어 딱지를 억지로 떼어내면 "흉터 남는다.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그냥 놔둬라."라고 입을 대던 어린 시절의 엄마 모습이 오버랩된다. 성한 날이 드물도록 숱하게 까지던 무릎에 상처 입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나는 스스로 어른이 되어 간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그 익숙하고 오래된 감각의 기억들이 강렬한 빨간색의 표지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그 찌릿한 아픔과 보기 싫게 덕지덕지 내려앉은 적갈색의 딱지가 떨어진 후 느껴지는, 주변 살보다 말갛고 불그스름하게 돋아난 새살의 맨들맨들한 감촉. 상처의 깊이에 따라 오래도록 남아있는 흉터까지, 제목과 표지만 보아도 오래된 기억, 상처의 아픔이 너무나 살뜰히 느껴졌다.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마음이 더 쨍하고 깨진다. 주인공 아이가 겪은 상처는 작은 무릎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강렬한 첫 문장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

찌릿한 무릎의 상처보다 깊은 베임이 가슴께를 훑고 지나간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암 투병 중인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이 그림책이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



"엄마는 저 세상으로 영원히 떠났어."

나는 안다. 엄마가 어디로 떠난 게 아니라 죽었다는 것을.

(...)

아무도 나한테 엄마가 살아 있지 않다는 걸 말해 주진 않는다.

살아 있지 않는 게 죽음이란 걸 나는 다 아는데.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죽음에 대한 정의를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에게 숨기려 해도 어른들의 상처와 슬픔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 속에서 말없이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고 슬픔을 견디는 아이 모습이 애처롭다. 


하지만 슬픔은 참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엄마 냄새를 붙잡아두기 위해 꽁꽁 닫아둔 문을 할머니가 활짝 여는 순간, 아이 마음에도 구멍이 생겼다.



이럴 수가! 나는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안 돼! 열지 마. 엄마가 빠져나간단 말이야."

나는 마구 몸부림쳤다.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힘이 다 빠졌다.



상처가 곪으면 터지는 법이다. 터져야 딱지가 앉고, 스스로 떨어진 딱지를 대신해 새살이 자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일상을 회복하고, 커피 냄새와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 슬픔은 조금씩 옅어져 간다.


붙잡고 싶은 엄마 냄새...

그래, 엄마란 그런 존재이다. 냄새만으로도 느낄 수 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지 않아도 항상 가슴속에 머무르는. 


나도 엄마 냄새를 안다. 엄마는 모르는 엄마 냄새. 엄마의 냄새를 맡으면 푸근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덩달아 떠오른다. 아픈 엄마를 보살피며 문득문득 맡게 되는 익숙한 냄새. 나도 언젠가 아이처럼 엄마 냄새를 붙들게 될까 봐 책을 읽으면서 저릿해진 가슴을 내리누르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내 아이가 나는 모르는 내 냄새를 좋아한다. 나도 아이들에게 냄새로 기억되겠지. 빨간 무릎 딱지는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아물게 하려는 내 몸의 의지다. 딱지가 떨어진 자리, 불그스레한 새살 돋음. 


생은 그렇게 상처와 회복을 되풀이하며 단단하고 굳어진 살이 된다. 상실의 아픔이 그대로 생채기로 남아있지 않는 이유도 아물어진 살 속에 기억으로 남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책 한 권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린 기억을 아로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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