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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Nov 07. 2023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엔딩 고민은 비혼만의 문제가 아니다

<건강하게 살다 가장 편안하게 죽는 법 ; 우에노 이즈코 지음, 이주의 옮김, 동양북스, 2022>



부제를 보지 않으면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의 책이다. 일본의 사회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저자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싱글이다. 저자 소개를 보니 혼자서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들을 쓴 이른바 '싱글의 노후' 시리즈 전작들이 있는 모양이다. 아직 그 책들은 읽지 않았지만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비혼으로 살아오면서 받은 사회적 편견을 당당히 뿌리치고, 이제 혼자 늙어가며 혼자 맞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머잖아 초고령사회가 된단다. 2000년 고령화사회가 된 이후 17년 만인 2017년부터 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니 가히 놀랄만한 속도다. 세계가 한국을 걱정할 만하다. 저자가 살고 있는 일본이 시작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섰다. 궁금함에 인터넷을 검색하니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1970년에 고령화사회, 1994년에 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한다.(한경 경제용어사전. 2019 참조) 아무리 경쟁사회라지만 다른 건 몰라도 사회가 늙어가는 속도에서 시작은 몇 발 늦었는데 금방 따라잡았다는 게 썩 좋지는 않다.


속도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생각에 있다. 문화지체는 과학발전과 정신문화의 변화 속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늙어가는데 그에 대한 우리의 준비는 느리다. 노화가 앞선 일본에서 늙어감이나 죽음과 관련한 담론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웰다잉, 호스피스 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논의가 한 발 앞섰다. 지금 우리의 노인복지제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머잖아 일본의 '엔딩 산업'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기에 비혼의 삶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실제로 친구들 중 몇몇이 비혼으로 지내고 있어 근황을 전해 듣기는 한다. 애 키우느라 저녁 외출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지니, 그네들의 일상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한 구석이 있다. 나는 비혼 친구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애 키우는 평범한 아줌마의 삶이 안정되어 보이기도 하나 보다. 혼자 사는 자유로움과 만족감이 '늙어서 외로우면 어쩌나'라는 생각으로 치닫게 되면 싱글들도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여기에 저자의 '혼자 늙는 게 어때서?'라는 말은 오히려 유쾌하고 속 시원하다. 자식들을 떠나보낸 후 노부부만의 2인 가구보다 1인 가구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저자의 근거 자료는 다소 편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다는 인상을 주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싱글의 노화와 죽음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공감의 여지를 남긴다.


사람에게 죽음은 100% 일어나는 일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피할 수 없다. 죽을 날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 의지가 상당히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이다. '언제'와 '어떻게' 모두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던져진 출생에 비해 상당히 고무적이다. 물론, 사고사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도 있으니 사람 사는 일은 항상 불확실성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 때문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생각을 이어가 본다. 가장 보편적으로 '늙어서 죽는다'는 상황을 전제할 때, 죽음은 미리 준비가 가능하다. 병원이나 요양 시설 같은 데서 죽기보다는 자신에게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곳, 집에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노쇠나 지병이 있는 경우는 죽음을 예측할 수 있기에 죽음의 순간에 굳이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죽어가는 사람을 의사가 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사는 오로지 '사망선고'를 내리는 역할밖에 없으니 굳이 병원에 죽으러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혼자 죽는 것을 걱정하기보다 살아 있을 때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있을 때 나의 죽음이 어떤 모습일지 미리 준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같은 낯간지러운 말도 미리 해 두어야 한다.


여태껏 살아봐서 알겠지만 살고 죽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스스로 준비한다고 치자. 늙어가는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고민할 다음 문제는 죽음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상태일 때다. 노인들에게 가장 큰 불안을 준다는 치매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인지 기능에 문제가 생길 경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도 없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살만큼 살았지만 아직 사회가 인정할 만큼 늙지는 않았기에 이런 상황을 상상하면 답을 떠올릴 수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성년 후견인' 제도나 장애인 케어를 예로 들며, 돌봄이 시스템화되어 치매에 걸리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공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 역시 완벽한 대안은 될 수 없다. 물질적, 심리적 측면에서 좋은 돌봄이 시스템으로 갖추어지더라도 생존에는 필연적으로 '비용'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이나 서비스 영역은 역시 재력에 따라 차별적일 수밖에 없다. 


죽는 데 돈이 드냐고 궁금해할 사람이 있다면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호스피스에서 생명이 다해 가는 엄마를 두고, 1인실 사용 비용에 대해 잠시 고민했었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감염 우려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호스피스에서 1인실을 쓰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가족이 상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돌봄은 지속적으로 필요하므로 대부분 다인실을 쓴다. 마지막 순간에 다른 환자들의 심리를 배려하고, 가족들만 오롯이 함께 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가는 임종실이 1인실인 듯하다.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경험을 자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편협한 시각이라도 누가 뭐라고 한들 어쩔 수 없다. 코로나 상황이라 보호자의 교대가 까다로웠고, 다행히 아이들을 돌보아줄 환경이 가능했었기에 2주 동안 호스피스 1인실에서 엄마를 돌보았다. 국가의 지원이 있는 건지 약품비를 비롯한 대부분의 비용은 대학병원에 비해 아주 저렴하다. 그러나 병실료는 개인의 몫이다.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1인실 사용이었지만 머잖아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알고 찾아간 곳에서도 돈의 힘으로 엄마와 내가 머무르는 환경의 질을 우선시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후의 장례비 따위는 논외로 하더라도 죽음에도 돈은 든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생명과 돈의 가치를 비교하자면 답은 명백하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로도 생명을 경시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가혹하다. 돈 문제로 병원 생활이 힘든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임종기에 든 사람에게 드는 비용에 효용의 잣대를 갖다 대면 '안락사' 혹은 '존엄사'의 논란이 불거진다. 이런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사전 지시서'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연명의료 결정제도'에 따라 본인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할 수 있다. 건강할 때 서명했던 연명의료 거부에 대해서도 아플 때 마음이 달라져 철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명의료 거부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내 경험상 연명 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쓰고서야 호스피스에 입원해야 하는 현실에서 환자나 보호자는 절망감을 느낀다. 어디서부터가 연명 치료인지 누가 정확히 안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저자도 동의하는 듯하다.


"살고 죽는 데는 정답이 없어요. 가족과 직원이 함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이면 돼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p.167



죽음을 겪어보지 않고 어떻게 미리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을까? 끝까지 고민하고 망설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상황이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내 가족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알지만 죽음을 재촉하는 모르핀을 계속 놓아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누가 답을 알겠는가? 고통스러운 망설임은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다른 나라에서도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일고 있다. '원정 출산'처럼 합법적으로 죽음을 조력하는 곳으로 '원정 죽음'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 사람이 없듯이, 죽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디까지 윤리적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내 생명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엄마의 죽음이 나에게 남긴 파장이 큰 것처럼, 생명이 다한 후에도 그것은 여전히 큰 의미와 무게를 지닌다. 끝이 있다는 것이 분명한 만큼, 생은 소중하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비혼의 죽을 걱정을 담은 책이지만 비혼 아닌 사람들도 죽음을 고민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죽음이 부각될수록 삶이 더 중요해진다. 잘 산 다음에는 잘 죽어야 한다. 혼자 죽든, 가족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든 모든 죽음은 존중받아야 한다. 건강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겠지만, 그 역시 불확실한 미래다. 모든 불확실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혼자 죽을 생각은 없지만, 비혼인 저자가 자신의 죽음을 고민하며 쓴 <혼자 죽기를 권하다>는 책이 필연적인 죽음에 대해 '어떻게'라는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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