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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Nov 08. 2023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완벽한 인생은 없다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인플루엔셜, 2021.>



어제 오후에 도서관에 다녀왔다. 작은 아이 이름으로 신청한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한 시간 반 동안 자유가 주어졌다. 그것도 도서관에서! 집에서 공부하겠다며 따라나서지 않은 큰아이가 그저 고맙다. 책을 골라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온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귀한 시간이지만 조심스럽게 설문조사를 부탁하는 그녀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다. 제법 두툼한 설문지 두께에 잠시 내적 갈등을 겪었지만, 있다면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설문지를 받아 들었다.


아, 이건 '자살'과 관련된 설문조사다. 조사원의 설명에 따르면 연령별로 일정한 데이터가 필요한 모양이다. 자살에 관한 평소의 생각이나 주변의 도움 혹은 자살 관련 공공사업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들이 대략 30문제 정도 된다. 익명을 전제로 한다지만 간단한 학력과 소득 수준을 파악하고 있는 걸 보니 공공기관의 연구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어가 주는 힘이라는 게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읽는 순간 느껴지는 무게감을 나는 그렇게 표현한다. 나에게 힘이 될 수도 있고,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도 있는 말의 힘. 짧은 낱말 하나가 내 감정을 휘저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의 힘이 있다는 거다. 그래서 가끔 단어 선택이 한없이 어렵게 느껴지는가 보다.


작년부터 써 온 글 중에 '죽음'과 관련된 것을 모아 매거진으로 발행하고 있다. 단어의 힘으로 치자면 두려움, 회피, 좌절감, 막연함 같은 부정적 감정을 한없이 유발하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 하고 많은 소재 중에 굳이 이걸 선택하고 정리의 필요를 느낀 것은 순전히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다. 작년 가을 엄마를 보내고 어른 고아가 된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눈길 가는 대로 골라든 책들 중에 나이듦, 질병, 죽음과 관련한 책이 유독 많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은 옅어지겠지만, 아빠를 보냈을 때와 다르게 삶의 유한성이 유난히 크게 느껴져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자살 관련 설문을 해주고 나니 돌봄에 허우적대다 뒤늦게 읽었던 책 <미드나잇 라리브러리>가 생각났다. 베스트셀러였으니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자정의 도서관이라는 책 제목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 읽고 난 뒤에는 어느 세상에선가는 꼭 행복하고 완벽한 삶을 살겠다고 꿈꾸는 이들에게 평행이론의 환상과  대리만족이라는 즐거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삶을 다 살아 봐도 결국은 지금 생이 가장 귀하다는 내용으로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인기있는 책이 될 만한 어떤 울림이 있었을 거다.


'죽음'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고 지내던 때 이 책을 읽은 나도 보통의 독자다. 세상에는 너무나 흔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진리들이 있다. '인생이 끝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삶의 유한성 = 죽음'.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사는 공식이 주인공의 자살 시도 과정에서 뒤집힌다. 감히 겪어보지 못할 삶과 죽음의 경계, 마지막 선택의 순간. 그 위태로움에 마음을 졸이며 주인공의 다양한 삶에 감정 이입을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 도서관이라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고유의 세계에서 평행우주 이론에 따라 '다른 사람인 나'로 살아보는 경험. 다행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겪은 일이기에 망정이지, 실제로 내가 겪는다면 끔찍한 일이 될 거다.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 찬 인생을 버리려는 주인공의 우울감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아무리 깊은 우울과 무기력함을 느꼈어도 주인공은 결국 현실로 돌아온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위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생명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아마 사는 게 고달픈 시기였을 것이다. 누구든 그런 부침(沈)은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테드 창의 <숨>과 김희선과 주원이 연기한 <앨리스>라는 드라마를 비슷한 시기에 봤었다. 뼛속까지 문과생이라 양자역학이나 다중 세계 같은 과학적 가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내 선택에 따라 무수한 삶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선택하는 것은 하나의 길뿐이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하는 후회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일 뿐,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길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무섭고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다. 지금 가진 절망의 무게가 클수록 헤어 나오기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만큼 무겁진 않을 것이다. 현실에는 평행이론이 없다. 주인공 노라가 유일하게 머물고 싶어 했던 완벽한 삶도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었기에 정착하려는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결국 제자리,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고통스러워도 지금 여기에서 애쓰며 살아가야 한다. 절망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는 용기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슬픔과 절망, 용기와 노력, 그리고 희망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렇게 생의 한 시기를 살아낸다. 그것이 오롯이 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노라의 자살 시도가 소설이어서 다행이다. 다큐였다면 그걸 읽은 마음을 또 어찌 달래야 했을까. 허구의 이야기지만 고통스러운 과거를 이겨낸 작가의 극복기임을 안다. 그래서 가상의 이야기에서도 내 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베스트셀러는 괜히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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