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질, '좋은 죽음'을 바란다
<호스피스 의사가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깨달은 삶의 의미 ; 레이첼 클라크 지음, 박미경 옮김, 메이븐, 2021.>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기 때문일까? 이토록 괜찮은 책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니! 아니면 발간을 즈음했을 때 내 삶이 바빠 이 책을 놓쳤던 것일지도. 슬픔을 셀프 치유하겠다는 핑계로 도서관을 자주 어슬렁거렸다. 서가를 훑다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책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마침 나는 '죽음'을 생생하게 목격한 후였으므로 이런 단어가 유독 눈에 잘 띄었다.
제목을 보면서 '엄마의 죽음 앞에서'라는 상상의 책 제목을 떠올렸다. 나는 엄마의 죽음에서 느끼는 이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글자로 쏟아낼 수 있을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저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까? 호스피스 의사는 나와는 다르게 부모를 보냈으려나? 이런 생각으로 첫 장을 넘겼던 것 같다.
부모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언젠가 다가올 내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들을 읽어 나가고 있지만 고백하건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한없이 빠져들어 읽다가도 갑자기 책장을 들추기조차 힘들어 다른 가벼운 것들을 찾게 된다. 아이들을 돌보고 일상을 살다가 수시로 기습하듯 찾아오는 눈물과 공허함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내 감정은 넘쳐흘렀다.
제목이 준 많은 질문들과 달리 이 책은 빌려 놓고도 한참 동안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직설적인 제목에서 엄마의 죽음이 떠올랐고, 호스피스 의사라는 저자의 직업이 섧고 막막했던 2주 간 호스피스에서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책을 펼쳐 들면 뭔가 정곡을 찌르는 슬픔을 마주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이 책 역시 다른 책들 사이에 묻혀 한동안 외면했었다.
가 닿아야 할 곳은 돌고 돌아도 언젠가 가게 된다. 삶의 이정표가 있는 사람은 길을 아무리 헤매어도 결국 길을 찾게 된다. 엄마의 상실은 외면하고 잊고 싶은 현실이지만 결국 내가 다 껴안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방치해 두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된 것도 내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인 책마저 읽어내지 못하면 나를 돌보겠다는 다짐이 허물어지는 거라 생각했다. 책을 읽는 것이 죽음을 다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슬픔을 온전히 느끼는 애도의 과정이라 여겼다. 살면서 책 한 권 읽는데 이렇게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초반부는 다른 책들과 병행 독서를 하면서 속도를 조절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헤어 나오지 못하고 몰입을 하게 된 것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대개는 막판에 무슨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지는 않아요. 졸린 증상이 계속 이어지죠. 어떤 환자는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자기도 해요. 배가 고프지도 않고 입맛도 없고요. 갈증도 거의 안 느껴요. 본인은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해요. 뇌도 점점 반응하지 않게 되죠. 때로는 이런 과정이 육체가 정신을 보호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두려워하지 않도록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p.227)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너무 잘 표현한 부분이다. 엄마의 길고 깊은 잠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또 한 번 설움이 밀려왔지만, 그 과정에서 두려움은 덜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병은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특히 암은 그 부위가 어디가 될지 모르는, 막연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구체적인 두려움을 동반하는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항암 치료라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고 한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오래 살기를 희망하며 힘든 치료에 매달린다. 누구는 기적처럼 회복되기도 하고, 누구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치료가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이런 차이가 더 두려움을 유발하는지도 모른다.
심폐 소생술과 인공호흡, 승압제, 위장으로 이어지는 관을 통한 인위적 영양 공급 같은 의학적 처치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현대 과학의 기술이다. 그러나 이 기술들 역시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대신 다른 부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심폐 소생술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건 예사다. 인공호흡기를 한 번 달고 나면, 죽기 전에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살인과 동일한 무게의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약으로 혈압을 높이는 것이 약해진 심장을 언제까지 대신할 수 있을까? 그 약물의 독성을 이겨내는 간 기능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상태인 걸까? 회복이 힘들 만큼 쇠약해져, '먹는다'는 가장 큰 인간의 본능을 스스로 충족할 수 없는 상태로 몸속에 줄을 넣어 영양을 공급하면 몸은 그것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을까? 목에 구멍을 뚫고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주는 기도 삽관은 또 어떤가?
멀쩡하게 사는 동안 이런 장면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모든 것을 다 감수하겠다는 결심으로 치료를 감행하더라도 그 후폭풍은 예상을 뛰어넘는 고통을 수반할 수 있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지 않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경우, 중증 환자에 대한 처치들은 대개 보호자의 동의로 이루어진다. 의사의 설명을 듣기는 하겠지만, 득과 실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어느 것이 옳은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자신이 죽는 방식은 각자 원하는 대로 미리 선택하는 것이 후회나 분란을 줄이는 방법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분노하고 부정하든, 조용히 받아들이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과 그 사실을 모르는 나머지 사람들 간에 차이가 있다. 말기 환자들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반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가진 것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조급하기 때문에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남은 삶의 순간을 깊이 음미한다. 그러므로 호스피스에는 호의와 미소, 품위와 기쁨, 친절과 예의, 사랑과 연민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가득하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p.372)
저자는 완화의료 병동에서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운다고 고백한다. 호스피스에서 엄마를 지켜본 나는 단 하나의 죽음만을 목도했으므로 많은 죽음을 겪은 저자의 깨달음을 깊이 공감하진 못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의 상실 앞에서 좌절할 뿐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경험이 강렬할수록 그 의미는 무한히 확장된다.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삶을 무한히 연장할 수는 없다. 어떤 고통을 겪든 종국에는 마지막 숨을 내쉴 때가 온다. 그 단순한 하나의 사실이 깊은 울림으로 나에게 남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살아온 이유가 될,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에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엄마의 마지막을 내가 지키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어쩌면 마지막까지도 엄마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로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저자의 아버지 역시 항암을 그만두고, 평생 살아왔던 대로 일상을 보내면서 가족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의사였던 아버지에게 의사인 딸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랑뿐이었다. 나도 엄마에게 내 사랑을 전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귀해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다른 과와 달리 소아청소년과는 비급여 항목이 없어 진찰료만으로 운영을 해야 하니 문 닫는 동네 소아과도 많고 의대 내 전공 이탈자도 많다고 한다. 자본의 논리가 의료계를 주도하는 현상이다. 의료 수가를 높이기 위한 대형 병원의 의료 사업은 특히 암 환자처럼 두려움이 큰 환자에게 효과적이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줄을 연결해 힘겹게 숨을 이어가는 것이 병원 사업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죽음이 가까운 환자에게 과연 도움이 될지는 확언할 수 없다.
'죽음의 질 지수'라는 게 있다. 영국에서 개발된 '좋은 죽음'을 측정하는 지표다. 전 세계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의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의료 수준을 평가한다. 개발국답게 영국의 죽음의 질 지수는 1위다.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는 영국의 완화의료 모습이 부러웠는데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새삼 엄마가 가시기 전 몇 달 동안 항암을 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화학 요법으로 끝까지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호스피스 완화 의료는 그 취지에 공감하지만, 여러 병원에서 호스피스 상담을 하고 입원까지 하는 과정에서 겪은 바로는 아직 아쉬움이 크다. 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 환자와 가족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 지원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결국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문제이기도 하다. 죽음은 피하고 싶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레이첼 클라크, 그녀 같은 의사를 만난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그리 두렵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좋은 의사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모든 죽음은 존중과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