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도 죽은 것처럼 살지 않기를
<기시미 이치로 지음, 고정아 옮김, SA 퍼블리싱, 2021.>
오래전 학교에서 배운 3단 논법.
'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고로 나는 죽는다.'
기시미 이치로의 말 '사람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를 삼단논법으로 변용하면,
'사람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고로 나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도 된다. 병들고 아파도 된다. 죽을 날이 멀지 않을 만큼 늙어도 된다. 살아있는 그 자체로 사람은 가치 있는 존재다.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한 기시미 이치로의 강연 기록인 이 책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다.
엄마와 함께 호스피스 병동에 머무는 동안 의식이 없는 상태로 살아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했다. 정답은 없지만, 기시미 이치로의 책에서 조언을 찾았다.
'타자 공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가 타인에게 공헌을 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도 돌보는 이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하니 타인에게 공헌하는 일이다. 돌보는 이가 보살피는 행위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게 하니 그 또한 아픈 이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의식 없이 누워만 있어도 그때는 나에게 엄마가 있었고, 당연한 돌봄이더라도 엄마를 도울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 엄마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나에게 공헌한 셈이다. 늙고 병들어 죽는 순간까지도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은 죽어가는 이에게도 그를 돌보는 이에게도 의미 있는 이야기다.
저자의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죽은 이후에도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멀리 떨어져 살아서 만날 수 없는 가족처럼,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존재일 수 있다. 삶, 죽음, 노화, 질병 어느 상태든 관계없이 '사람'이기에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의식 없는 상태의 살아있음'이 가지는 의미를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준 부분이 있다.
사람이 인격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최소한의 상호작용이 없어도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사람입니다. 이처럼 뇌사 상태의 사람이든 태아든 그들이 사람, 즉 인격일 수 있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조건에 처한 사람이건 내가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그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지요.
(...)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사람을 살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죽은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을 잊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잊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
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여기고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려면 항상은 아니더라도 때때로 그 사람을 떠올리며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
어떤 상태의 사람이든지 인격적 존재 그 자체인 셈이지요. 비록 죽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기시미 이치로의 삶과 죽음>, 기시미 이치로 지음, pp. 107-109 중 일부)
죽음을 삶의 단절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죽어서도 살게 되는 것이 존재가 가진 한없이 무거운 가치가 아닐까. 그러니 반대로 살아서도 죽은 것처럼 있으면 안 된다. 삶과 죽음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통찰이 곧 삶을 향한다.
존재의 의미에는 조건이 없다. 그런 이유로 과거에 화려한 성공을 이루지 못했어도,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고민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된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혹은 '만일 ~라면'이라는 헛된 가능성에 기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죽음이 가르쳐 주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