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마거릿 와일드 글, 론 브룩스 그림, 최순희 옮김, 시공주니어.>
책장을 덮기가 아쉬울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림책이다.
할머니가 선물을 남겼다. 선물을 준 게 아니라 '남긴'이라는 표현에서 감이 온다. 할머니가 남긴 선물은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느낌은 제대로 맞아떨어진다.
죽음에 대한 많은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감정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구절을 만나고 싶어 했다. 말로 다 하지 못할 뒤엉킨 감정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몰라 한 가닥 한 가닥 헤집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눈물을 쏟아내고, 위로받고, 나를 돌보았다. 그 긴 여정은 끝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앎을 전제로 하는 그 많은 책들보다 이 그림책이 더 울림이 크다. <무릎딱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할머니가 남긴 선물>도 슬픔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한다.
죽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감정은 수시로 이성을 장악한다. 그 감정이 분노라면 적절하게 표출되도록 일종의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슬픔은 다르다. 상실의 슬픔은 억누르거나 강도를 약하게 에둘러 표현하기보다 오히려 충분히 느껴야 한다. 애도의 과정은 <죽음이 물었다>의 저자 아나 아란치스의 말처럼 발버둥 치고 소리 지르며 진저리가 나도록 온몸으로 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아픔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할머니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특별하지 않다. 계좌를 해지하고, 빌리거나 빚진 것을 갚고는 그저 일상을 누리던 모든 평범한 것들을 모든 감각으로 느낀다.
"잔치를 열고 싶구나."
"입맛이 돌아온 거예요?"
순간, 손녀 돼지는 기대에 가득 차서 물었습니다.
"밥을 먹고 싶은 게 아니란다. 마을을 천천히 거닐면서 나무와, 꽃과, 하늘을 이 눈으로 보며 즐기고 싶구나..... 모든 것을 말이야!"
할머니 돼지와 손녀 돼지는 마을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할머니는 간간이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았어요.
<할머니가 남긴 선물> 중에서
할머니에게 일상의 모든 장면은 '잔치'다. 찬란하게 빛나는 업적도 없고, 자식 내외도 없어 보인다. 오래도록 같이 살아온 손녀와 함께 하던 집안일과 마을 풍경이 그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하다. 할머니 돼지와 손녀 돼지라는, 의인화한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그 인생사 저변에 얼마나 많은 스토리가 담겨있을까. 단출한 조손 가정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지만, 기나긴 서사가 없어 오히려 다행이다. 푸근한 돼지 가족으로 상징된 그림이 슬픔을 감싸 안는다. 그림책이 주는 위안이다.
삶의 소중함을 하나하나 음미해 보고, 손녀가 그것을 오롯이 깨닫게 이끌어 주는 것이 할머니의 '준비'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가는 이에게나 남는 이에게나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보살핌의 역할이 바뀌면서 손녀 역시 할머니의 선물을 일상에서 펼쳐낸다. 그렇게 싫어하던 옥수수 귀리죽을 한 그릇 다 먹으면서 손녀는 성장했을 것이다. 작은 일상의 행동 하나도 할머니와 함께 한 것이 의미 있는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김장철이 다가오니 김치가 떨어졌다. 할 줄 모르고 받기만 하다가, 엄마가 병을 앓으면서는 같이 담그다가, 이제는 혼자서도 김치를 담가 먹는다. 팔다리에 힘을 잃어 움직이지 못할 줄 어찌 알았는지, 주저앉기 직전에 엄마는 두고두고 먹을 소금 포대도 사다 놓았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도 백김치, 알타리 김치, 열무김치, 김장 김치 담그는 법을 골고루 알려주던 엄마가 나름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같이 시장에서 배추와 무를 고르고 양념을 하던 평범한 일상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일임을 이제야 안다.
혼자 살림을 거뜬히 해 내는 손녀 돼지처럼 나도 어른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