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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Nov 17. 2023

<죽음이 물었다>

잘 죽으려다 보니 잘 살게 된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Death is a Day Worth Living ;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세계사, 2022.>



잘 죽는 법을 찾기 위해 책을 읽다가 다른 나라의 죽음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은 이미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많이 확산되어 엔딩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영국은 죽음의 질 지수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할 만큼 완화의료가 앞섰다. 이번에는 브라질이다. 


아나 아란치스는 브라질의 완화의료 최고 전문가다. 파티에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죽어가는 자를 돌본다는 말을 하면 모두들 슬금슬금 혹은 대놓고 자리를 떠난다면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지적한다. 그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죽음이다. 지금 누리는 즐거움 끝에서 누구나 맞이하는 것이 죽음인데, 우리는 왜 그리 자꾸 피하려고만 하는 걸까?


지금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글을 쓰는 나도 아직은 죽음이 버겁다. 절박함과 필요에 의해 죽음을 다루는 책을 읽고 있지만, 그 간격이 제법 긴 걸 보면 나 역시 죽음을 기꺼이 마주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서글플 일은 아니다.


죽음은 늘 가까이 혹은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는데 외면하고 싶고, 나한테는 좀 더 늦게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산다. 죽음이 이 좋은 생을 빼앗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평소에는 관심이 1도 없다가 막상 아쉬우면 친한 척하는 사람이 얼마나 재수 없는지 안다. 사는 내내 죽음을 찬밥 신세로 대하면서 죽을 때가 다가오면 평온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모순을 가진 우리는, 죽음의 입장에서 '재수 없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물었다>의 저자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당신은 잘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이기에 두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죽음은 이 '좋은 생'의 끝에 필연적으로 있는 것이다. 내 삶의 일부라는 뜻이다.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말 자체는 역설적이지만 사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겪는 삶의 일부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인정한다. 그럼 죽음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니 겁먹지 않고 살면 그만인가? 단지 두려움을 쫓는다고 해서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아니다. 그 직면이 가져오는 깨달음,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이 제대로인지 생각해야 한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삶은 우리가 그 시간 동안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체험이다. 날이 저물기를, 주말을, 휴일을, 은퇴를 기다리며 삶을 보낸다면 죽음의 날이 더 빨리 오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진정한 삶은 일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을 사는 것'은 특정 순간이나 삶의 즐거움에 맞추어 켜고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니다. 즐겁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는 100퍼센트의 시간을 산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지나간다. 삶은 날마다 일어나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죽음이 물었다>, 아나 아란치스, p.107.)



삶은 날마다 일어난다. 그날들이 쌓이고 흘러간 끝에 죽음이 있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산다는 말이 모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의 행복이 모여 행복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지, 행복한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날들을 살다가 어느 날 짠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짠하고 등장해서 모든 걸 끝내 버리는 게 아니다. 잘 살고 있는 날, 매일의 삶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잘 죽는 법을 고민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오늘 사는 이날을 잘 사는 게 잘 죽는 비결이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면 한정된 삶의 가치를 더 잘 안다는 건 논리다. 삶과 죽음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생한 겪음이다.


죽음을 궁리하다가 잘 사는 법을 찾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면서 오히려 살아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도,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묻는 '죽음'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삶과 죽음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존재적 좀비'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로 살지 말고 '존재'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내 인생을 죽은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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