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그러나 공감 가는 세상을 사는 법
<박지현 지음, 메이븐, 2022.>
제목이 마음에 든다.
'좋은' 혹은 '바람직한'이나 '훌륭한' 같은 불분명한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대놓고 아주 사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의 수식어가 편안하게 느껴져서 그렇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프로그램의 제작 스태프인 VJ이다.
VJ(Vidoe Journalist).
카메라라는 영상 촬영 도구를 사용하는 작가라고 본다면 이 직업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될까?
'다큐멘터리 3일', '유 퀴즈 온 더 블록' 같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프로그램 제작자인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상황이나 장소를 겪어본 사람다운 겸손함이 돋보인다. 평범한 진리를 이야기함에도 그다지 진부하거나 얄팍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에세이를 쓸 때 내가 부족함을 느끼는 '경험'치를 충분히, 아니 넘치게 가진 그녀의 이력 덕분일 게다.
엄마와의 사별 이후 삶과 죽음에 대한 거창한 단어들이 실은 주변에서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숱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큼, 언젠가 죽게 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해내야 할 일상과 우울감 섞인 공상을 오가며 살다 보니,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삶과 죽음 사이 오선지에 걸린 음표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나를 둘러싼 세상 전부가 살고 죽는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호스피스에 엄마를 모시기 전 여러 병원에 보호자 진료를 다니면서 친절한 사람들을 여럿 만났었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엄마를 대신해 처음 호스피스 상담을 갔었다. 호스피스 담당 진료과에서는 예약이 안 되어 있으니 대리 진료도 볼 수 없다고 했다. 응급실에 이미 접수가 되어 있어 당일 현장 접수조차 불가능했을 때, 담당 간호사는 자신의 아버지도 같은 병을 앓고 가셔서 내 심정을 잘 안다며 예약 진료가 다 끝난 뒤 의사를 만나게 해 주었다. 그 간호사는 겪어본 자만이 아는 그 안타까움을 내 태도에서 읽었음이 분명하다. 진료 명단에도 없는 환자의 보호자에 대한 친절, 사심을 가득 담아 '참 괜찮은 태도'다.
그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긴 시간 상담을 해 준 젊은 의사도 참 고마웠다. 완화의료에 대한 인식이 하나도 없던 나에게 호스피스에서의 의학적 처치와 의미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보호자 입장이 아니라 환자 입장에서 치료를 생각해보게 하는 귀한 조언을 들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렇게 평온하게 설명해 주는 의사의 친절, '참 괜찮은 태도'다.
서울 유명 병원에 통원하는 것이 버거워지면서 엄마는 다시 지역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했다. 진료과의 노교수는 차가웠지만, 그의 지시를 받고 다시 찍은 MRI와 다른 병원에서 받아온 영상 자료를 비교해서 병의 진행을 설명해 준 젊은 의사는 친절했다. 영상 분석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다 늦은 저녁 시간 전화를 걸어온 의사는 엄마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자기 아버지도 같은 병을 앓았다고 했다. 의사이면서도 자신의 부모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일이라며, 보호자의 무력감에 절망하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건조하지만 설득력 있는 '참 괜찮은 태도'로.
나만 겪는 것 같아 힘들고 억울한 일도 알고 보면 다른 누군가도 겪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의 친절을 통해 깨달았다. '삶과 죽음'이라는 나의 렌즈로 바라본 세상은 도처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공감과 위로와 친절을 베풀고 있음을 알게 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한다.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오히려 삶을 긍정하고 감사해한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자기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 늙어 병들어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어도 하루를 감사히 살아내는 사람들, 그 역설적인 상황들을 숱하게 경험한 저자의 내적 고백이 친구의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저자는 렌즈를 통해 나보다 더 많은 삶을 보고 들었다. 그러고는 아등바등 욕심부리지 않고 지금 가지고 누리는 것에 감사하자고 말한다. 흔들릴지라도 그것조차 내가 살아가는 모습의 일부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오늘'을 살아가자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진부한 다짐이 아님을, 오랜 시간 몸으로 겪으며 배운 것이라는 게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 좋은'이 아닌 '참 괜찮은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