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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Jan 17. 2024

<어떻게 죽을 것인가>

존재의 힘은 삶과 죽음을 모두 인정하는 데서 온다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2022.>



제목이 주는 무거움 때문인지, 좋은 책인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도서관 서가에서 죽음에 관한 책이 있는 곳은 한적하다. 갈 때마다 다시 보고 싶은 책이 대출되고 없었던 적이 별로 없다. 분야마다 좋은 책이 많고, 눈길을 끄는 신간도 많이 나오니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나도 죽음의 책들이 나란히 꽂혀있는 서가를 훑지 않았더라면 이런 좋은 책이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일에 묻혀서 죽음을 잊고 산다. 누구나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어야 하는 죽음은 쉽게 외면받는다.


내가 좋아하는 과학자 정재승 님의 추천사에 끌렸고, 다른 책(물론 그 책도 죽음을 다루는 책이다)에서 이 책을 언급했기에 읽기도 전에 기대감이 생겼다. 주제를 잡고 책을 읽어나갈 때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한 권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알게 된 다른 책을 찾아 읽다 보면 그 주제에 대한 깊이와 넓이가 생긴다. 저자들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저마다의 경험들을 들려주는데  그들의 관점은 한 국가나 문화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진다. 특히 죽음에 대한 책들이 그렇다.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하는 자세부터 필요하다. 우리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 삶과 죽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면 이제껏 내가 얼마나 좁은 시선으로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다. 언뜻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죽음은, 그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킨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은 빛나기 시작한다.

살아있다는 존재론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두 손, 두 발을 사용하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것부터 틈만 나면 티격태격 다투는 아이들, 회사 점심에 나온 것과 똑같은 메뉴로 저녁을 차려주어도 군소리 없이 잘 먹는 남편의 식성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감사한 일이 된다.


그뿐인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저절로 뒤따른다. 죽는 순간 후회가 없도록 지금을 충실히 살게 되는 강력한 삶의 동기가 생긴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삶을 고민하게 만들고, 언제 끝날지 모를 유한한 삶을 의미 있게 채우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죽음 말고 죽음 직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어느 날, 우리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병을 얻을 수도 있다. 다행히 큰 탈 없이 나이가 들어도 노화로 약해진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온다. 그럴 때는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살려는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한 때가 오면 죽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암을 치료하며 조금씩 무너져가던 엄마를 돌보던 일은 그런 고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내가 아파서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을까? 씻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 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면 아무리 죽음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살아왔다한들 삶에 대한 회의가 들지 않을까? 더 이상 치료가 힘든 때가 다가와 막연했던 죽음이 오늘내일 일어날지도 모를 현실이 된다면 남은 시간을 어떤 심정으로 보낼 수 있을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국 신체적으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우리는 노인들이나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의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실망시키는지 알 수 있다.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자실같이 고립되고 격리된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중 중요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늙어 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정직하게 살펴보기를 꺼려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환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더 많아졌고, 환자들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위로와 안식을 거부당해 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pp.23-24.)


귀하고 귀한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깝게 보내는 현실에 대한 의사로서의 고민이 고맙다. 우리 엄마의 담당 의사가 그와 같은 생각을 조금만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뒤늦은 아쉬움이 크다. 70대 초반의 노인이었지만 십수 년 전 아빠를 먼저 보내고 혼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은 이후 마음과 몸이 차례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주저앉게 되는 순간이 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삶의 위기를 곳곳에서 만난다.

평생지기 남편을 먼저 보내고 찾아온 우울도 잘 넘겼던 엄마는 불치병이라 여겨지는 암 앞에서 당신의 죽음을 마주했다. 예측할 수 없는 여생의 길이는 불안을 가져왔다. 노화든 질병이든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혼자 거동하기 힘들 만큼 늙었거나 병에 걸려 신체적인 독립성을 잃으면 식사나 이동을 거들고 병원 치료를 받게 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여기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삶의 질이다.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돌봄과 치료는 달라져야 한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돕겠다며 옷을 입혀주고, 일하지 말고 편히 쉬라고 빨래 개는 것도 말리고, 음식을 흘리기라도 하면 아이 다루듯 닦아주던 행동이 엄마의 자율성과 신체 능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적으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그래야만 남아 있는 신체 능력을 유지할 수 있고, 독립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옷을 입혀주는 게 스스로 입게끔 놔두는 것보다 쉬워요. 시간도 덜 걸리고요. 서로 마음 상할 일도 적어지지요." 그래서 노인들이 신체 능력 유지를 우선시하지 않을 경우, 직원들은 노인들이 마치 헝겊 인형이라도 되는 듯이 옷을 입히고 만다. 그리고 점차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해야 할 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pp.166-167.)


고령사회니만큼 곳곳에 요양보호시설이 늘고 있다. 집에서 가족들의 케어가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면 노인이나 환자는 시설을 찾기 시작한다. 뉴스에서 간혹 보도되는 요양원의 노인 학대는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아동 학대와 닮은 꼴이지만 걱정이 된다고 해도 가정마다 돌봄의 형편이 다르니 시설 이용은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 저자가 만난 요양원 의사 빌 토머스는 '요양원에 존재하는 세 가지 역병'인 '무료함, 외로움, 무력감'(p.183)을 없애기 위해 요양원에 식물과 동물을 대거 유입했다. 위생과 안전 대신 환자들에게 돌봄의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내 집과 물건들을 모두 두고 침대 하나와 작은 서랍 정도가 전부인 병실을 누군가와 함께 써야 한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황량해질 것이다. 집을 떠나 요양원에 가는 이들이 어떤 심정일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의 선택권이 없어지는 곳, 위생과 안전을 위해 정해진 규칙과 일과에 따라 관심 없는 프로그램을 권유받으며 갇혀 지내는 삶이 노인들에게 달가울 리가 없다.


집에서 돌보았던 엄마를 호스피스에 모시게 된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며칠째 먹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 없이 내리 잠만 자는데, 호흡은 수시로 거칠어졌다. 산소포화도를 체크해 가며, 보호자 진료로 처방받은 산소호흡기를 사용하면서도 불안했다. 의학 기술이 이렇게 발달한 시대를 살면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엄마를 보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요양원이든 병원이든 코로나로 가족 면회가 제한되는 곳에서 엄마를 외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세상을 떠났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엄마는 집에서 편히 눈감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을 다루는 전문 기술이 없던 우리는 엄마 몸을 가장 덜 힘들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결국 호스피스의 완화의료를 선택했다. 가정 호스피스 상담도 받아보았지만, 엄마의 상태로는 가정형 호스피스보다 입원형을 권한다는 설명에 또 한참을 울었다. 엄마는 어떤 죽음을 원했을까?


나는 우리 병원에서 완화치료 전문가로 일하는 수전 블록 선생을 만났다. 그녀는 이처럼 어려운 대화를 수천 번 경험한 사람이며, 의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환자 및 가족들과 함께 삶의 마지막 단계를 둘러싼 쟁점들을 잘 다루어 나가도록 훈련시키는 분야에서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선구자다. 수전이 말했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해요. 가족 면담에도 절차와 방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수술에 버금가는 기술과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에요." (같은 책, p.277.)


어려운 대화지만 필요했다. 나도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엄마에게 굳이 죽음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말하기 기술이 부족했고, 용기가 없었다. 곧 생명이 다 할 것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남은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내고 싶은지, 남기고 싶은 말은 없는지, 어떤 치료를 받고 싶은지 묻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약해졌으니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지에 대해 괜찮은지를 물었다. 늘 우리 좋을 대로 하라던 엄마는 그 방식대로 우리 의견을 따랐을지도 모른다. 다행인 것은 중환자실의 각종 도구들을 몸에 걸치고 마음을 다급하게 만드는 심장 박동 소리와 그래프로 마음을 졸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엄마를 보내드렸다는 거다. 처음 겪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환상은 깨졌지만, 적어도 고통을 더하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다. 책을 통해 선진국의 완화의료 체계를 알수록 아쉬움은 커진다. 집에서도 그런 호스피스 케어를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지 못한 길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가 그렇다. 남은 시간, 죽기 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끝이 나는 순간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에 두렵고, 어떤 희망을 갖는 것이 좌절될까 봐 두렵다. 모두 그렇게 두려워하며 마지막 남은 귀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우리 삶은 이론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죽음의 담론을 읽어도 막상 내가 죽음 앞에 서면 아는 대로 행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삶은 정점이든 종점이든 기억하든 경험하든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죽는 자의 역할'이라는 구절이다.


이른바 기술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 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죽는 자의 역할'이라는 개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죽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p.380.)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 며칠 동안 엄마는 의식이 없었다.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추억을 나누고, 우리들에게 어떤 말이든 남겨주기를 바랐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아쉬워하기에는 엄마가 생 전체를 통틀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너무나 많다.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 내가 하는 많은 행동은 모두 엄마에게서 배운 것이다. 김치를 담가서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소식 뜸한 형제들의 중심 채널이 되는 것, 서운함은 달래어 잊고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는 것은 엄마가 원하는 형제의 모습이다. 죽은 자의 역할은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계속된다. 몸은 떠났어도 마음속에는 계속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을 공감하며 읽었다. 죽음을 용기 있게 대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도 되고 힘도 된다. 존재의 힘은 삶과 죽음을 모두 인정하는 데서 비롯됨을 죽음 공부가 더해질수록 절절이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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