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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Jan 19. 2024

<어머니를 돌보다 Mothercare>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위로받다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 릴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돌베개, 2023.>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이 책의 부제를 깊이 음미해 본다. 자식으로서 늙고 병든 부모를 보살필 의무와 사랑은 쉽게 수긍된다. 죽음이 극적인 경험이고, 단 두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오니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에 대처하려는 태세를 갖추게 된다. 언제 어디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위험-도피 반응을 본능으로 다져온 것이 인간이니,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서도 두렵고 피하고 싶은 건 본능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 앞에 선 아픈 부모를 돌보는 것은 자식 된 자의 사랑의 표현이자 역전된 보호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지지해 주었던 엄마의 역할과 희생만큼 나도 엄마를 돌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혈연관계란 그런 것이다. 책임과 의무가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관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책임과 의무는 돈을 받고 일하는 직장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결이 다르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른 관계와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사랑의 감정은 한 마디로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게리 체프먼의 <사랑의 5가지 언어>에서 알 수 있듯 사람마다 사랑이라고 느끼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자신 또한 그 방법으로 사랑받길 원한다. 죽음을 전제로 했을 때 사랑의 표현은 더 어렵다. 이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에서 죽어가는 부모에 대한 돌봄은 기꺼이 할 수 있다. 막돼먹은 자식이 아니고서야 아픈 부모를, 특히 엄마를 돌보는 일에는 누구라도 몸과 마음을 다 쏟으려 한다. 내 경험치를 벗어나는 일이라 감히 상상할 수는 없지만, 혹시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살았던 부모라 해도 죽음이 다가온 처지라면 마음이 약해지고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륜이라 부르는 보편적 선함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죽음이 주는 기회다.


의무와 사랑, 다음은  죽음이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하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거나 혹은 외면하려 하지만 결국 언제인지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순서 없이 찾아오는 죽음이지만, 대개는 부모가 먼저 죽게 된다. 자식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부모를 돌보는 것이 보편적인 상황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보편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잘 모른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어떤지, 부모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무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죽음을 겪는 과정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과 닮은 데가 있다. 사람들은 출산은 고통스러운 순간이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낳은 사람은 뒤늦게 깨닫는다. '출산의 순간'과 '행복' 사이에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과 고통이 있는지. 


부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지니 어느 순간 부모가 아프다고 하는 말에 둔감해진다. 그러다가 건강검진으로 의심스러운 증상이 발견되고, 부랴부랴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본다. 그 후는 익히 아는 대로 중병 진단, 부정과 슬픔, 억울함이 뒤따르고 어떻게든 오래 살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이어진다. 어떤 병에 걸리든, 어떤 치료나 돌봄을 받든 마지막은 늘 같다. 죽음. 하지만 그 사이에 어떤 노력과 고민과 고통이 있는지 먼저 경험한 이들은 세세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마치 육아의 실체를 닥쳐서야 이해하는 것처럼, 죽음도 맞닥뜨려서야 알게 된다. 태어남과 죽음은 삶의 이쪽과 저쪽에서 그렇게 다른 듯 닮아 있다.


그다음은 양가감정. 

여기에는 겪어본 자만 알 수 있는 묘한 심리적 반응이 담겨 있다. 아픈 부모를 돌보는 것은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다. 병원 진료와 한없는 대기 시간, 이름도 어려운 약들의 효능을 기억하며 매일 챙겨야 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거동이 힘들어진 부모를 케어하는 것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다. 만족스러운 목욕물의 온도를 미세하게 맞추는 것부터 씻기고, 입히고, 양치질과 입 헹굼까지 하는데 곱절의 시간과 힘이 든다. 몸을 돌려 눕히거나 용변 뒤처리를 감당하는데도 힘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자식에게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부모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쓰는 마음 케어는 더욱 어렵다.


문제는 이 과정이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저자의 경우처럼 11년이라는 긴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우리 엄마처럼 한두 달 정도로 짧을 수도 있다. 그 길이가 어떻든 돌봄을 해야 하는 자식은 삶의 다른 일들과 함께 떠맡게 된 돌봄 노동에서 때때로 지친다. 좀 쉬면 몸의 피로는 풀리겠지만, 부모를 돌보는 자신의 부족한 정성에 마음의 고단함은 더 커진다. 양가감정은 몸이 지치는 것보다 더 크게 돌보는 자식들을 힘들게 한다.


비슷한 경험을 한 이의 이야기는 위로와 공감을 준다. 여자로 인생을 살면서 겪는 출산과 육아의 경험과 함께 '엄마'에 대한 감정은 가장 보편적인 정서인 듯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미국인 작가가 쓴 글이지만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상황은 국적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점이 있다. 각자의 경제적인 수준은 돌봄의 정도와 질의 차이에 영향을 끼치지만, 어떤 상황이든 어머니를 돌본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고민과 갈등이 존재한다.


<어머니를 돌보다>가 위안을 주는 것은 이런 맥락 위에 있다. 내가 엄마를 돌보며 느꼈던 무력감, 몸과 마음의 고된 노력이 아무런 희망이 되지 못하는 좌절감,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또 하나의 엄마로서 아픈 엄마의 남은 생을 돌보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없는 상황의 난처함, 돌봄과 돌봄 사이에서 나의 인생도 지키고 싶은 욕심과 그런 내 모습에 대한 실망. 그런 복합적인 마음들이 뒤엉켜 혼자 괴로웠다. 상황은 다르지만 린 틸먼이 들려주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진솔한 경험담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모범적인 병사였지만, 비참했다. 어머니를 돌보는 문제에 대해 얘기해도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했다. 연민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를 더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의 상태는 좋아지거나  좋아지지 않을 것이었고, 시간이 걸릴 것이었고, 어머니는 머지않아 죽을 것이었고, 어머니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했다. 모든 사람의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지만, 우리 가족의 미래는 어머니의 미래에 구속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 것인가.

다르게 대처하거나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낸다. 내 심리상담사는 계속해서 우리가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면의 압력과 외부의 압력에 굴복했다. 좋은 딸이 되어야 한다는, 좋은 동생이 되어야 한다는. 어떤 날은 기분이 괜찮았다. 어떤 날은 내 초활성화된 초자아에 절망했다. (<어머니를 돌보다>, 린 틸먼, pp.107-108.)


엄마를 요양원에 보낼 생각은 손끝만큼도 없었다. 직접 겪은 바가 없어도 요양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컸고, 우리가 받은 오늘이 엄마의 깊은 헌신 덕분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 남매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노력했다. 호스피스에 가기 전 마지막까지 엄마를 모시고 살았던 언니는 내가 모를 고통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꺼이 엄마를 모신다는 자부심과 함께, 다른 형제들처럼 자기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쉴 수 없는 상황에 홀로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일상의 보살핌은 점점 어려워졌다. 좋은 아들 딸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로 모두가 애썼지만 모두가 힘든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효심은 우리의 이기심과 맞닿아 있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엄마는 죽을 것이고, 엄마가 떠난 뒤에 할 수 있는 만큼 더 애쓰지 않은 스스로를 못 견딜까 두려웠을 것이다. 후회하며 자책할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해 엄마를 돌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죽는 것을 지켜보기. 나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뭔가를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붕 뜬 채로 멈춰 있는 상태였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 한 여자가 죽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 일을 관찰했다. 어머니가 느린 속도로 해체되는 것을. 임종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이 아는 그 무엇과도 동떨어진 죽음의 과정을/임종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미친 짓처럼 느껴진다. 죽음은 언제나 뜻밖의 사건이다. 예상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 그리고 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건은 여전히 불가피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또한 당신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그 일이 일어난다. (같은 책, p.187.)


적나라한 죽음의 묘사는 겪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다. 직접 겪으면서도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눈앞의 상황이 당혹스럽다. 부모를 돌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이의 독립적인 삶이라는 희망을 전제로 하지만 부모를 돌보는 일의 끝은 죽음이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감히 그 끝을 바랄 수 없다. 돌봄 과정에서도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반문해야 하는 어려운 길이다. 잘못된 선택으로 상황이 더 나빠지기라도 하면 그 죄의식을 감당하기도 벅차다. 돌봄의 어려움을 이해받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내 목표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위로를 건네거나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을 깊이 찌른다. 나는 위로와 함께 아픈 순간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불편함을 얻었다. 아직도 내가 치유해야 할 슬픔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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