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잘 사는 법
애증의 관계
잘 사는데 필요한 뻔한 것을 묻는 중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빼놓을 수는 없다. 가족, 하면 각자 떠올리는 장면이나 느낌이 있을 것이다. 온화한 표정의 가족 누군가의 모습이나 함께 있을 때의 편안한 느낌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실 가족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오가는 사람들이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나 집 나간 엄마 혹은 모든 걸 갖춘 듯 완벽해 보이지만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부모 같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가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평생 열심히 일하면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킨 연로한 부모님, 그런 부모님의 삶을 닮은 많은 아들과 딸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실감 나도록 그들의 외모와 성격을 꼭 닮은 아이들까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보통의 가족 사이에서도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다. 가족 안에서 느끼는 양가감정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편향을 띨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 달리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더 편해야 할 사이에서 더 많은 상처를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죽하면 <가족을 끊어내기로 했다>(셰리 캠벨 지음, 제효영 옮김, 심심, 2024)는 제목의 책까지 있을까.
그러나 보통 사람인 나와, 나와 비슷하게 평범한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너무 극단적인 경우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삶이니까. 잘 살기 위해 가족 간의 관계를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 풀리지 않는 심리적 문제가 따라다닌다면 내면 아이를 돌보는 많은 책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한 번쯤은 그런 책들을 통해 잊어버리고 싶어서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나 아픔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다.
심리학 증후군
내 기분에 따라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별거 아닌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버럭 화를 내고는 돌아서서 왜 그랬을까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그런 내 삶을 돌아본다. 가족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에게 원가족은 어떤 사람들인가. 먼저 읽은 <스몰 트라우마>의 영향 때문인지 사소한 것들이 어쩌면 내 마음에 숨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체적으로 과거를 되뇌어본다. 머리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내 마음에 자국을 남긴 일이 많을 수도 있다.
2남 2녀 중 차녀로 자란 나에게도 그런 기억들이 있다. 내 상처의 시작은 아들, 딸 하나씩 낳았으니 아들 하나만 더 낳자던 내 부모님의 가족계획이 어긋난 데서부터였다. 배 모양이며 걷는 뒷모습이 영락없이 아들이라는 동네 어르신들의 경험주의적 점치기가 부모님의 기대를 한껏 높였던 탓인지, 당연히 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셋째가 딸이라 실망한 아빠는 내가 태어나고 일주일 간 안아주지도 않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까, 이제 다 컸으니 그런 이야기쯤은 흔한 과거 회상 정도라 생각했는지 엄마가 무심코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때는 사 남매 중 내가 아빠의 이쁨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으니 당연히 상처가 될 리 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당시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막내아들까지 낳고 부모님의 가족계획은 끝이 났지만,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의 나는 형제들 사이에서 착한 아이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을 짰을지도 모른다. 위아래로 양보하고, 먹고살기 바빴던 엄마 일을 돕고, 공부도 착실히 하던 그 아이는 칭찬을 먹으며 잘 자랐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가족 간의 관계를 조율하고 소통의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도 그 스토리의 맥락이 아닐까 싶다.
왜 나는 내가 늘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기억도 안 나는 일에 대해 그저 들었을 뿐 상처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생각해 보면 착한 아이로 자라면서 내 욕구를 억눌러야 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나 하나 참으면 되지 하는 마음이 습관이 되어 갖고 싶은 걸 양보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실패를 최소화하는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인정 욕구와 안정 지향주의는 내 마음속 어린아이의 생존 전략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의과대학 학생들이 새로운 질병에 대해 배울 때마다 꼭 자기 얘기인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의대생 증후군처럼 심리학 책을 읽고 나면 꼭 나를 그 틀로 분석해내려고 하는 증상이 생긴다.
가족, 자기 이해의 시작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모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이제 와서 원가족과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상처를 보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지금의 나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나는 왜 실수하기를 두려워하고, 왜 남에게 항상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겸손과 미소를 장착하고 사람들을 대할까.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자주 열등감을 느끼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할까. 내 원가족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가족은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들이다. 가족 안에서 내 성격과 습관과 삶에 대한 태도가 형성된다. 온화하고 안정적인 가족 관계가 잘 살아가는 토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친밀하게 얽매인 가족 관계 속에서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면, <박상미의 가족 상담소>(박상미 지음, 특별한서재, 2022)라는 책을 읽어볼 만하다.
가족은 인간이 태어나 경험하는 첫 번째 사회이며, 평생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현재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 반드시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해야만 한다. 너무 오래 묵어 치유하지 못할 것 같은 상처도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용기를 내는 것만으로 치유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가까워서 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자기도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론 밖에서 억누른 감정을 집에서 가족들에게 쏟아붓기도 한다. 상처 준 걸 알아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쑥스러워서 혹은 옛날 사람처럼 말 안 해도 알겠지 하는 마음에 덮어두고 넘기는 일이 많다. 서운함이 쌓이면 미움이 된다. 혹시 감정 풀이 대상이 아이들이라면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아이의 정서 발달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성인군자도 아닌데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가족보다 남에게 이런 원초적 감정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것보다 가족이 나을지도 모른다. 올바른 감정 해소법을 익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이상 아무리 마음 수양을 해도 가끔씩 욱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내 나이 벌써 불혹을 넘어도 그렇고, 70이 넘은 집안 어른도 가끔씩 욱 하신다.
살아온 시간이 쌓인 만큼 내 마음도 자라서 저절로 풀리는 묵은 상처도 있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여전히 마음에 맺히는 게 있을 수 있다. 가족은 서운함이 넘치면 차라리 안 보고 마는 남이 아니다. 각자의 사정이 다르니 정답은 없다. 심리학 책을 읽으며 스스로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상처가 깊은 사람이 전문적인 심리학 내용까지 섭렵하고 스스로 치유를 시도하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아물지 않는 큰 상처가 있다면 문턱이 낮아진 심리상담을 받는 것이 낫다. 나처럼 무던하게 살았지만 가끔씩 가족에게 지치는 때가 있는 정도라면 책으로 셀프 치유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저 책에서 이야기하듯, ‘더 나아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위하는 길이니까, 가족이든 그 누구든 지나간 일, 어쩌지 못하는 관계에 지나치게 얽매이기보다,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가까이 있으니 내 마음 다 알겠지 하는 헛된 욕심을 내려놓고 가족들을 대해보자. 그 관계 속에서 내가 온전히 바로 설 수 있다면 그 또한 잘 사는 비결이 될 것이다.